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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 둘째의 이혼과 친정동생의 법정구속, 아버지의 입원

이순자 자서전

by nanum* 2022. 10. 4.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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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 둘째의 이혼과 친정동생의 법정구속, 아버지의 입원

 

옛날 친정 어머님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나쁜 일은 혼자 오는 법이 없단다. 꼭 짝을 지어 찾아오지

둘째 아들 재용이 이혼한 것이 1990 5, 우리가 백담사로 들어온 지 1년 반이 되던 때였다. 시련의 연속이던 1989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아 더 이상 추락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던 우리 앞에 어머니의 말씀처럼 또 다른 불행이 예외 없이 문을 두드렸다. 주변의 친인척들이 제사 모실 사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구속되고, 부모인 우리 부부마저 백담사로 유배되자 아이들은 결국 계속되는 불행 속에 비틀거렸다.

 

그분 퇴임을 몇 개월 앞둔 1987 12월에 결혼식을 올렸던 둘째 부부가 파경을 맞은 것이다. 둘째의 파경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난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 이혼이 점차 늘어가는 추세라 해도 이혼은 당사자들은 물론 양가 집안에도 큰 상처를 남기는 불행이었다. 그런 이유로 난 기도할 때마다 애처로운 그들 내외가 어떻게든 다시 잘 화합되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같은 여자 입장에서, 또 딸자식을 가진 부모 입장에서 둘째 며느리를 향한 내 안타까움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은 내게 세상에는 정말 인력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했던 가슴 아픈 경험이었다. 보기 드물게 현숙하고 착하던 며느리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러 눈물에 잠겨 백담사로 찾아왔을 때 나와 며느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깊이 사랑하는 아들이고 듬뿍 정을 쏟았던 며느리였다. 인생을 알기에는 아직 어리기만 한 그들이 고통의 늪에 빠져 허덕이다 불행의 급류에 떠내려가는 것을 나는 백담사에 앉아 그저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고통 속에서도 자신들보다는 부모의 마음을 더 생각하는 속 깊은 아이들이었지만 결코 막을 수 없었던 불행이었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각자 제 갈 길로 떠나가는 두 아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또다시 시련의 절벽을 느껴야만 했다. 자식의 고통과 불행은 부모에겐 가장 참기 힘든 형벌임이 분명했다. 자신에게 닥친 어떤 시련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던 그분도 먼 이국 땅에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뼈만 남은 피폐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의 눈물 앞에서는 슬픔으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우리가 백담사에 쫓겨와 있지 않았더라면, 외국에서 유학 중이던 그 아이들을 연희동 집으로 불러들여 살펴주고 도와줄 수 있었더라면, 혹시 파경을 막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 일은 오래도록 내게 화상(火傷)처럼 지워지지 않는 회한으로 남았다.

 

둘째의 이혼 후 해질 대로 해져 만신창이가 됐던 내 가슴 위로 또 하나의 형벌이 찾아왔다. 그 해 겨울에 있었던 충격적인 소식, 막내 재만의 대학입시 실패였다. 재만의 대학 실패는 정말로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재만은 어려서부터 늘 성실하고 성적이 우수해서 집안의 자랑거리였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새벽 6시면 일어나 학교 가기 전에 한 시간씩 테니스나 수영, 합기도 등을 배웠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방과 후 숙제는 물론 예습 복습도 빼놓지 않아 형과 누나들이 신기해하곤 했었다.

 

그런 재만이 방황하고 있었다. 백담사로 들어온 지 얼마 후의 일이었다. 돌도 되지 않은 손녀를 데리고 우리를 찾아온 효선은 울며 말했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재만이 그날따라 이상하게 눈자위가 붉게 상기되어 무슨 일인지 물어도 도무지 대답이 없었다고 했다. 잠든 후 살펴보니 몸에 심하게 맞은 자국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경호관이 들려준 보고에 의하면 재만이 수업 중 친구들 앞에서 아버지에 대한 험담을 하는 선생님에게 대들다 맞았다는 것이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아무리 물어도 재만은 입을 꾹 다문 채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학입시 시험 당일에도 기자들이 시험장 안까지 따라 들어와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어대는 통에 시험에 집중해야만 할 재만에게 큰 충격과 마음의 상처를 입혔던 모양이었다.

 

어찌해야 좋으냐며 나를 안타깝게 쳐다보는 딸아이를 보며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백담사에서 달려나가 보살펴줄 수 없는 처지로 애만 태우고 있는 사이, 방풍벽도 없는 세상에 혼자 내던져진 채, 아버지의 명예가 산산이 실추되는 무서운 세상을 목격하면서, 재만은 대학공부는 왜 필요하며 대체 무엇을 위해 세상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 것이냐며, 아버지를 백담사로 보낸 세상에 대한 분노로 미래의 꿈을 접고 있었다. 막내 재만이 대입 낙방이라는 인생의 뼈아픈 실패를 겪은 후, 예전의 맑고 순진하던 얼굴 대신 세상에 대한 반감으로 일그러진 모습으로 어미 품을 찾았을 때 그 모습은 그대로 내 가슴에 한이 되어 맺혔다.

 

“노 대통령이 자꾸만 여기를 떠나 제3의 장소인가 뭔가 하는 곳으로 옮기라고 독촉하는 눈치던데 우리를 여기 그냥 있도록 내버려둘까요?"

묻기엔 조심스런 문제였다.

"글쎄, 백담사에 있는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상상외로 많아지자 신경이 쓰여서 그러는가 보오. 하지만 연희동 집으로는 돌아가지 말고 별장을 구해준다며 나오라니 영 마음이 내키지를 않소."

"그래도 나오라고 할 때 어디든지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나오라는데 나가야지 말을 안 듣다가 또 무슨 해코지를 당하면 어떻게 해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잡혀갈 사람 다 잡혀갔는데 여기서 당하면 뭘 더 당하겠소."

불안했던 예감은 이번에도 예외 없이 맞아 떨어졌다. 청와대측 제의에 그분이 거절 의사를 표시한 얼마 후 집행유예로 풀려나 있던 내 남동생이 또다시 구속됐다.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5공 청산 회오리 속에서 처음 구속되었던 동생은 1 8개월 만에 한 사건으로 두 번, 그것도 법정 구속되는 선례가 없는 진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청와대 제의란 우리 내외에게 백담사를 나와 연희동 집이 아닌, 청와대가 구해주는 변장, 즉 제3의 장소로 은둔지를 옮기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제의라기보다는 차라리 지시였다. 많은 사람들의 추측대로 동생의 구속이 정치보복이었는지, 아니면 우리를 제3의 장소로 가게 하기 위한 압력수단이었는지 정확한 정황은 알 길이 없었다.

 

그 일로 친정 부모님은 엄청난 충격을 받으셨다. 충격으로 인해 친정 어머님이 지병인 심부정맥의 급작스런 악화로 입원하셨던 것이다. 친정아버님은 절망감 속에서 그 때부터 법을 배우시겠다고 육법전서를 사 들고 법조문과의 씨름을 시작하셨다.

"여보, 나는 말이요. 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는 결코 이 백담사를 떠나지 않을 작정이오!"

8년 가까이 처가살이를 하며 장인, 장모를 친부모 이상으로 모셨던 그분이었다. 친정부모님의 상처는 곧 그분의 상처였다.

 

몸과 마음이 몹시 괴로웠던 그 8월이 지나자 백담사는 마치 물결처럼 밀려드는 손님들로 붐볐다. 매일 4천 명이 넘는 방문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주야로 우리 내외를 찾아주었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물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10월에는 방문자 수가 매일 5천여명을 넘었다. 그렇게 방문자는 점점 늘어나 그 무렵 연 인원이 무려 40만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온종일 차로 달려와야 하는 그 멀고 먼 백담사까지 오는 길의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우리 내외를 찾아주던 그 많은 분들의 정성에 목이 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폭우로 외나무다리마저 끊기면 절 옆의 험한 청룡재를 넘어와 글썽이는 눈으로 우리 내외의 건강을 당부해 주던 고마운 분들, 그분이 악수라도 청하면 비에 젖은 손을 다시 젖은 옷자락에 닦고 나서야 손을 내밀던 그 인정 많고 순진한 사람들, 멀어지는 버스 창 밖으로 언제까지고 손을 흔들어주던 그 수많은 분들이 주던 따뜻한 위로를 난 결코 잊을 수 없다.

 

온 국민이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던 1990년 크리스마스이브였다. TV 뉴스에서 그분에 대한 노 대통령의 연희동 귀가 제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보, 노 대통령이 연희동으로 내려와 평화롭게 살라는데 내려가실 생각인가요?"

 

그 말을 하면서도 내 가슴은 뛰었고 마음은 벌써 서울 집에 있는 막내 재만을 향해 달렸다.

"그렇게 해야지요. 어서 가서 우리 막내도 다시 일으켜 세워 대학에 보내야 하고 버려져 있던 집도 돌봐야 하고 할 일이 많지 않소. 차라리 노 대통령 말 듣지 말고 나 한 사람, 교도소 갔으면 당신이라도 연희동에 남아 막내를 돌봤을 것이고, 그랬으면 막내가 지금처럼 방황하는 일은 없었을 것 아니오. 당신, 그 동안 못난 남편 만나 마음고생 정말 많이 했어요. 연희동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청와대의 통보를 받고 나도 참 많은 생각을 했소. 당신이 마음 아플까봐 내색은 안 했지만, 지난 11 4일에 대구공고 후배들이 날 보기 위해 백담사를 찾아오다가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소, 그것도 부부동반으로 오다가 말이요. 사실 그 사고 이후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소. 또 그런 불행한 일이 다시 생길까봐 걱정인데 그렇다고 마음먹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내 마음 편하자고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일 아니오, 노 대통령이 하도 괘씸해서 그 사람 임기가 끝나기 전에는 결코 백담사에서 떠나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아무래도 나가야 할 것 같소.”

 

연희동 집을 떠나 백담사로 들어오던 서럽던 그날로부터 꼭 2 1개월 8(769) 만에 결정된 귀향이었다.

 

<이순자 자서전_당신은 외롭지 않다> 562 – 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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