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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 치고 삿대질이 난무한, 모욕의 절정을 보여준 5공청산을 위한 전대통령의 국회증언

이순자 자서전

by nanum* 2022. 10. 1.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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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 치고 삿대질이 난무한, 모욕의 절정을 보여준 5공청산을 위한 전대통령의 국회증언

 

혼자 극한의 외로움에 홀로 술을 마시고는 친구를 찾아가겠다는 그분을 잡기 위해 필사적인 심정으로 계단을 막고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는 계단을 막고 앉아 울고 있던 나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분이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잠든 그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서 빨리 임기가 끝나 자유인으로 돌아갈 그날이 사무치게 기다려졌다. 그리운 친구들, 보고 싶은 사람들과 만나 맘껏 취해도 보고 위로와 격려를 주고 받으며 우정과 사람의 정이 실컷 굽이치는 삶, 그분 앞에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나는 고대했었다. 그러나 그분을 위해 내가 품었던 그 간절하고 평범한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백담사에 들어온 지 1년이 되던 그날, 그분은 정든 집도 아닌 깊은 산 속의 처량하기 짝이 없는 비닐하우스 안에 가마니 한 장을 깐 채 갓 출감한 장세동 부장과 마주앉아 비감스런 술 한잔을 기울이는 처지가 됐으니 말이다.

 

세월이 흘러 다시 반 년이 지났다. 1989 12 31일 새벽의 일이다. 백담사 생활 1 1개월이 되는 그날, 그분은 눈 덮인 백담사 일주문을 나섰다. 의정 사상 유례가 없는 전임 대통령의 국회증언을 위해 여의도로 떠난 것이다.

 

증언 전날 밤, 우리 가족은 모두 법당에 모여 철야기도를 하며 밤을 새웠다. 누가 권한 것은 아니었지만, 절벽 같은 암담한 현실에 기도라도 해야 견딜 수 있어서였다. 절실하게 구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에는 삼천 배를 한다는 스님의 말씀에 아이들 모두가 아버지를 위해 삼천 배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그 마음을 백담사 주지 도후 스님께서 받아주셨다.

 

지난 해 11월 참회의 고별사를 드리고 산간벽지 한사(寒寺)에서 반성과수도의 길을 걸어온 제가 오늘 이처럼 국회에 나와 다시 한 번 국민 여러분께 언짢은 문제들에 관해 말씀 드리게 된 것을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엄숙한 사죄의 인사로 시작된 그분의 이 국회증언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리고 눈가가 젖어온다. 1989 12 31 1989년의 마지막 날이었고 1980년대를 마감하는 시간이었다. 그분에게는 1989년이라는 한 해가 저물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1980년대라는 그분이 국경을 책임졌던 기동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의미했다. 최고의 영광과 최악의 치욕이 현기증이 나도록 번갈아가며 그분과 우리 가족을 덮쳐왔다가 사라져간 1980년대였다. 결국 제야의 그 국회증언은 1980년대가 그분에게 요구한 마지막 역할이 되었다.

 

한 시대가 저무는 그 마지막 날, 나는 하루 종일 TV 앞에 앉아 있었다. 자동차 배터리를 이용한 자가발전기에 의지해 겨우 흐릿하게 돌아가는 백담사 골방 TV의 안개 같은 화면은 그 즈음 우리가 처해 있는 밑바닥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 화면 위로 흐릿한 그분 모습이 떠올랐다. TV는 종일토록 그분을 향해 날아드는 온갖 욕설과 고함을 쉬지 않고 토해냈다. 처음부터 증언이 필요해 마련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명확히 보여준 국회 증언대였다. 증언대에 세워 모욕을 주려는 의도였던 만큼 그분을 향해 고함치고 삿대질하는 야당의원들은 경쟁적이었다.

 

증언이 필요해 마련한 자리였다면, 그래서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분을 국회로 불러냈다면 답변할 수 있는 기회를 준 후, 시시비비를 가려도 늦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증언대에 선 그분에게는 무엇 하나 제대로 설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모욕과 한풀이를 당한 그날, 그분의 국회증언을 이끌어가는 국회 풍경은 그분이 경험했던 모든 모욕의 정점이기도 했다. 그분을 수행해 의사당까지 간 이양우 변호사가 울분에 차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TV화면을 통해 보였다. 평소 조용한 성품으로 특별한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으면서 중요한 외국순방 때마다 탁월한 보좌역할을 해오던 김병훈 전 의전수석비서관도 백담사의 한 구석방에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있 었다. 내 곁에서 함께 TV를 보고 있던 가족들은 물론 이제는 짐이 들어한 식구 같던 백담사 식구들, 그리고 그분 측근들과 비서관들 모두가 TV수상기 화면 위로 펼쳐지던 그 기막힌 장면에 오열하고 있었다.

 

1년 전 백담사행을 요청하며 청와대로부터 그분에게 전해졌던 약속은 이러했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나라를 구해줄 분은 각하 한 분뿐입니다. 야당에선 계속 5공문제를 물고 늘어지는데 여소야대 정국 하에 있는 정부로서는 속수무책입니다. 각하께서 5공문제 전반에 대한 해명성 사과를 해주시고 연희동을 떠나 2, 3개월만 은둔해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시면 5문제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고 잘 마무리 지은 후 연희동으로 다시 모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백담사 유폐 후 정부에서는 오히려 그분 주변에 대한 수사를 확대해 검찰에 특별수사본부까지 설치했다. 그리고는 그분이 청와대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면서까지 반드시 보호하려고 했던 그분 측근들을 전격 구속했다.

백담사 생활 반 년이 지나도 청와대로부터는 전화 한 통 없었다. 청와대가 그분의 증언을 간청하기 위해 백담사로 밀사를 보낼 것이라는 말이 들려온 것은 이미 몇 개월 전이었다.

 

청와대가 5공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그분의 국회증언을 요구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분의 충격과 분노는 대단했다. 전임 대통령의 국회증언이라는 것이 전례에도 없을 뿐 아니라 헌법정신을 훼손하고 좋지 않은 선례를 만들게 된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분의 완강한 반대를 예상했던 것일까. 그분 증언에 대한 방법들은 비공개 방문증언에서 방문증언으로, 방문증언에서 다시 국회증언으로 천천히 그 모양을 바꿔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이 '국회증언'에 대해 분노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요구 속에 깃들어있는 정부와 정치권의 '불순한 의도'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분의 국회증언 내용 자체보다도 그분을 국회증언대로 끌어내어 그분과 그분 통치시대에 대해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정치 단막극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 해 5 30, 청와대로부터 파견된 밀사 한 사람이 백담사를 찾아왔다.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였다. 김 총무는 그분 재임시절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이었다. 예상대로 김 총무가 들고 온 청와대 전갈은 국회 증언을 받아달라는 요구였다. 다시 한 번만 더 나라를 위해 희생해달라는 것이었다. 김 총무는 그분과 마주 앉자 시종 눈물만 떨어뜨릴 뿐 도무지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는 여러 번 오열했고 그래서 몇 번이고 대화가 중단될 정도였다. 예나 지금이나 아랫사람들의 딱한 모습을 보지 못하는 그분이었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계속 울기만 하는 옛 비서실장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분은 잠시 후 선선히 청와대의 요청을 수락했다.

 

“김 총무, 노 대통령께 가서 전하시오. 우선 세상에 둘도 없던 친구이며 동지인 노 대통령과 나 사이에 이런 깊은 균열이 생기게 된 것이 애통하다는 것과 나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 노 대통령이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꼭 필요하다면 국회증언뿐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내가 무얼 더 못하겠소. 돌아가 분명히 전하시오. 5공문제에 대해서는 통치자였던 내가 무한책임을 질 것이오. 비겁하게 누구에게 떠넘길 생각 같은 것은 없소.”

 

그것이 그 치욕적인 국회청문회의 시작이었다.

 

12 15, 청와대에서 여야 영수회담이 열렸다. 바로 2년 전 대통령 선거전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던 3김이 함께한 자리였다. 만찬을 겸해 초저녁부터 시작된 회담이었지만 밤 12 30 TV 방송이 끝날 때까지도 어떤 합의를 이루었다는 뉴스는 나오지 않았다.

"여보, 이제 그만 주무세요. 저렇게 4당 총재들이 모여 오래 머리를 맞대고 있는 걸 보면 뭔가 합리적인 결론이 나오지 않겠어요.”

"나도 동감이오. 국민들도 5공 청산 문제는 이제 그만 끝내자고 한다는데 노 대통령이나 노련한 세 김 씨가 그것을 모를 리 있겠소. 시간이 좀 걸리는 걸 보니 분명 뭔가 이루어질 것 같소.”

 

정국안정을 위해서라면 모욕적인 전임 대통령의 국회청문회까지도 수락하겠다는 그분의 진정은 그분을 아끼는 측근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발표된 회담결과는 놀랍게도 야당측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전임대통령의 국회증언'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6공의 출범 초기부터 야당이 줄곧 주장해온 것들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합의라기보다는 정부여당의 항복에 가까운 결론이었다.

 

그날 저녁, 백담사로 달려온 그분 측근들은 몹시 흥분해 있었다. 그들은 분노와 배신감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분 역시 4당 총재회담에서 수긍할 수 있는 결론이 날 것으로 기대했었다. 흥분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도 그분의 몫이었다.

 

"내가 국회에 나가 당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시오. 모든 것을 대국적으로 생각하도록 합시다. 어차피 정치권에서 시작한 5공 청산인 이상 정치권 책임자들이 합의해서 끝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여러분의 우려대로 이것으로 설사 끝맺음이 되지 못하고 새로운 시작이 되고 악순환이 되어 내가 감옥에 가게 되는 일이 생긴다 해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나 한 사람 희생해서 나라가 안정이 되고 발전해나갈 수 있다면 어떤 일이고 못 할 일이 있겠소. 이제 더 이상 정치권에서 5공 문제를 당리당략 차원에서 악용하는 일을 막아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도 이번 증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부족한 시간이나마 준비에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12 5, 국회광주특위와 5강특위는 12 30일에 최규하 대통령의 중언을, 1일에는 그분의 증언을 청취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시의 이영우 변호사는 국회에서 파견된 특사로부터 출석요구서와 질문서를 송달받았다. 그분에게 보내진 질문서는 무려 125항의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변호사는 국회특사에게 준비기간의 촉박으로 인해 그분의 국회증언이 불가능할 수도 있음을 통고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그분은 답변서를 준비하는 데 날짜가 촉박하다 하더라도 국회증언 일정에 동의하겠다는 답변을 서울로 보냈다. 이튿날 이 변호사는 백담사를 방문해 그분 답변 결심을 확인한 뒤 기자회견을 통해 그분이 31일 국회에 출석하여 증언할 것임을 발표했다. 나흘 후 최 대통령은 국회증언에 응할 수 없다고 통고했다. 국회광주특위는 최 대통령을 고발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분도 증언에 나설 준비를 서둘렀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주위의 반대를 잠재우고 증언을 결심한 22일부터 증언일인 31일 오전 10시까지는 겨우 8일간의 시간이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그때는 아직 질문서도 도착하지 않아 대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또 질문서가 도착한다 해도 자료가 없어서 충실한 내용으로 답변서를 준비하기란 어려운 형편이었다. 정부측에 자료를 요청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정부측에서 제대로 제공해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12 23일 오후 7시경, 청와대의 노 대통령이 백담사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그분에게 유럽을 다니며 곰곰이 생각한 결과 영수회담 쪽을 택하게 되었다는 사정을 설명했다.

 

답변서 작성을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2 26일이었다. 준비작업에 필요한 인력도 문제였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이양우 변호사, 안현태 전 경호실장, 김병훈 전 의전수석비서관, 그리고 민정기 비서관이 전부였다. 1 25개 항의 질문에 대한 성의 있는 답변을 준비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인원이었다. 결국 가족들까지 소매를 걷어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사정이었다. 큰아들 재국과 사위 윤상현, 그리고 미국에서 방학을 맞아 인사차 와 있던 지인 김승환 박사가 합류했다.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12.12 5.18사태 등 당시의 일을 직접 겪었거나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그 상황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안현태, 이양우, 김병훈, 민정기 씨 등이 모여 자료를 뒤지며 답변서를 쓴다고 꼬박 미친 밤을 새워야 했으니 말이다. 더욱 난처한 것은 증언내용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각각 너무도 분명하고 다양해서 서로 입장을 조율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즉 전임 대통령의 국회증언은 역사적 기록이 될 것이므로 현재의 정치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만 증언해야 해야 한다는 의견과 진실하다고 해서 정치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우리의 시각과 입장만을 고집하면 정치권을 자극해 5공 청산 정국이 마무리되기 어렵다는 현실론이 팽팽히 대치했다. 마음은 급하고 손발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중에도 시간은 흘러갔다.

25일 큰아들 재국과 김 박사가 백담사에 들어와 망연자실해하던 일, 바로 그날 저녁, 김병훈 수석이 워드프로세서를 갖고 들어와 모두가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뻐하던 일, 26일 안현태 실장과 민정기 비서관,그리고 이양우 변호사가 도착해 그날 저녁부터 겨우 증언서 작성을 위한 캠프가 진용을 갖추던 일 등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드디어 첫 회의가 열렸다. 우선 답변서 작성의 방향부터 결정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곧 철야작업이 시작됐다. 29일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략적인 답변서가 준비되어 그분이 독회(讀會)라도 한 번 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4 5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125개 항에 달하는 질의에 대한 답변서를 작성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 많은 양의 자료를 다 읽는다는 것도 어림없는 일이었고, 복잡한 과거사들을 분석하고 정리해서 정확하게 서술해야 하는 작업을 그 짧은 기간에 끝낸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부족한 일손, 엄청난 분량의 일, 4 5일이라는 시간의 제약이 주는 압박감, 가족들까지 합세해 밤샘을 계속했지만 도저히 기간 내에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급한 대로 대략적인 답변서가 준비된 것은 30일 오후였다. 팀 전체가 며칠 동안 매일 24시간 밤샘 작업을 했던 결과였다. 워낙 짧은 시일에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느라 미흡한 부분이 많았던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마지막 정리를 위해 민정기 비서관과 김병훈 수석이 꼬박 밤을 새웠지만 원고는 그분이 출발하기 직전에야 겨우 완성되어 교정작업은 미처 끝나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분이 완성된 답변서를 다 읽어본 것은 백담사를 출발한 차가 춘천을 막 통과하던 동틀 무렵의 일이었다.

 

국회증언이 끝날 무렵이었다. 나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TV 화면 속의 그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청와대의 김옥숙 여사였다. 오랜만에 그녀의 음성을 듣자 그리움이 밀려왔다.“마음이 아파 전화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도 아마 우리처럼 TV를 통해 그분의 처절하고 기막힌 국회증언 장면을 지켜보면서 차마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고맙다는 뜻의 말을 몇 마디 건넬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김 여사는 수화기 저편에서 문득 '5공청산'의 당위성을 차근차근 설명해나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내게 이해를 구하고 싶었겠지만 내 귀에는 그저 전화선 저편으로부터 진동해오는 아득한 메아리처럼 들렸다. 김 여사의 말은 이러했다.

 

“두 분께서는 당시에 청와대에 계셔서 잘 모르셨겠지만 두 분과 민정당이 하도 인기가 없어 5공 청산을 선수 쳐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대선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답니다. 선거를 치르면서 보니 국민들이 5공에 대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5공 청산 작업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때서야 진실이 바라보고 싶지 않은 알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 여사의 말처럼 5공 청산을 선수 쳐서 주장하고, 서둘러 5공 청산 작업에 가혹한 칼을 들이댄 것은 바로 노 대통령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진실의 정체였다. 파란만장했던 1980년대가 그렇게 가고 있었다. 우정도 사업이 될 수 있다더니, 그분이 노 대통령과 함께 가꿔온 40년 우정도 권력의 마성 앞에서 그렇게 보기 좋게 침몰해 버리고 있었다.

 

1980 9월 대통령에 취임했던 그분은, 1989년 제야(除夜)에 국회증언대에 선 최초의 전임 대통령으로서 1980년대가 자신에게 맡긴 마지막 소임을 치러내고 있었다. 그분과 나는 우리 앞에서 철썩이는 그 무서운 역사의 파도와 광풍을 넘어가야만 했다. 생애 가장 지독하게 길고 힘든 하루를 치러낸 후 먼 눈길을 달려 그분이 다시 백담사로 돌아온 것은 1990년대의 첫 날이 시작되던 1990년 정월 초하루 새벽 4시경의 일이었다.

 

<이순자 자서전_당신은 외롭지 않다> 546-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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