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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처럼 선포된 '역사바로세우기' 5공 부정과 죽음을 각오한 단식

이순자 자서전

by nanum* 2022. 10. 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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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에서 끌려간 전직 대통령

 

1995 12 1일 오후 2.

검찰소환장이 그분 앞으로 날아들었다. 모처럼 얻은 평화 속에서 평범한 행복 가꾸기로 기뻐하던 우리 가족을 향해 또 한번 정치보복의 광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그 해 6 27일 실시된 지방자치제선거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이끄는 민자당은 참패했다. 정국은 다시금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즈음 연희동 집을 방문한 주영복 전 장관이 그분에게 참 이상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선거에 참패한 후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김 대통령에게 '국면돌파를 위한 보고서'라는 것이 올라왔는데 그것이 보통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소수의 민주계 의원들을 이끌고 3당 합당을 통해 집권 민자당의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성공한 김 대통령은 집권 후 민정계 출신이 수적으로 우세한 당을 끌어가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와 같은 당내 역학구도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즉 지금의 구도 아래서 총선을 치르게 되면 인지도나 재력 면에서 민주계측 인사가 5, 6공 출신의 거물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 6.27 지자체 선거의 참패가 바로 그것을 말해주는 증명이다. 따라서 15대 총선에서 반개혁적인 인물들이 다수 당선되어 김 대통령의 개혁정책이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약간의 무리가 따르더라도 다음과 같은 조치가 불가피하다. 12.12 5.17, 5.18을 다시 문제 삼아 두 전직 대통령을 사법처리하고, 5, 6공 세력들을 수구세력으로 몰아 총선에 출마하지 못하게 한 후 새로운 정계개편을 통해 민주계 중심의 정권재창출을 성공시킨다'

 

얼른 듣기에도 믿기 어려운 엄청난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너무도 자세하고 구체적이어서 그냥 넘겨버리기 어려웠다. 주 장관이 돌아간 후 내가 그분에게 물었다.

"여보, 뭔가 심상찮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주 장관의 사위가 김 대통령 아들 김현철 씨의 심복이라던데 그 쪽에서 들은 것이 아닐까요?"

 

그분은 그런 구상 자체야 가능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 걱정할 일이 아니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설혹 참모들이 김 대통령에게 그런 발상을 보고할 수는 있겠지만,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대통령으로서 그렇게 국력소모가 많은 일을 감행할 리가 없다는 것이 그분의 판단이었다. 그분은 노 대통령 임기 내내 계속되었던 '5공청산 작업으로 얼마나 많은 국력소모가 있었던가를 지적했다. 올림픽 유치 후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로 불리며 전 세계의 주목 속에 부러움을 샀던 우리 경제가 그 불필요한 국력소모로 인해 너무도 어려워졌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김 대통령이 바로 자신의 전임자가 저질렀던 잘못을 똑같이 되풀이하여 나라를 망칠 리 없다고 그분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을로 접어들면서 그분의 확신을 비웃는 듯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가을프로그램을 새로 시작하는 TV 방송사들이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10.26부터 12.12. 그리고 80년 봄에 이르는 정치상황을 드라마로 제작해 일제히 방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MBC '4공화국' SBS '코리아 게이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화면 속에선 있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장면들이 재현되고 있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이 실존해 있는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 또 사법적으로 이미 무혐의로 처리된 사건을 다루면서, 그 드라마들은 최소한의 사실 확인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유언비어만을 근거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엮어내고 있었다. 즉 그분을 위시하여 당시 합동수사본부측 인사들은 모두 철저히 악한 인물로, 김재규, 장태완, 그리고 김 씨 등은 모두 선의상징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충격적인 것은 생존자들의 실명(實名)을 써가면서 만들어진 드라마였으므로 시청자들은 화면 속 장면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국민들은 겨우 15년 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공영방송을 포함한 주요 방송사가 동시에 다루는 것을 보면 적어도 최소한의 확인과정이 있었고 이 시점에서 다루어도 될 충분한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장면을 보고 분노한 나머지 TV수상기를 때려 부쉈다는 사례가 보도될 만큼 두 드라마의 선동효과는 파괴적이었다. 일부 언론들조차 '날개 떨어진 권력을 짓밟는 드라마',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무책임한 영상테러'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우리의 국군과 국민들이 우롱당하고 있다고 개탄하는 보도도 있었다.

 

날조 왜곡된 드라마의 내용 때문에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방송사에 자료와 증거를 제시하며 시정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방송사측의 반응은 무책임 그 자체였다. 이 방송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드라마니까 사실과다를 수 있는 건 아닌가

 

돌이켜보면 노태우 정부도 그분을 백담사행이라는 절벽까지 몰고 가기 위해 언론을 이용해 소위 조직적인 '언론플레이를 했었다. 그분 퇴임 직후부터 시작해 수개월간 단 한 마디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대중매체를 통해 계획적이고 줄기차게, 악의적으로 그분 명예를 훼손했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해명할 수조차 없게 얽어매어놓고는 항복을 받아내는 방법이었다.

 

국민들의 분노가 절정에 이르던 10 19, 국회본회의에서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계좌가 폭로됐다. 그 사건은 격앙될 대로 격앙된 국민감정에 기름을 부었다. 예정된 수순을 밟고 있던 김영삼 대통령의 공작적 정치보복 극은 그렇게 국민들의 감정에 편승해 마침내 제 얼굴을 드러냈던 것이다. 11 24, 김영삼 대통령은 이른바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미명 아래'12.12 5.18사건 관련자를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의 제정'을 선언했던 것이다. 우리 헌법은 물론 세계인권선언이 천명하고 있는 소급입법금지와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정면으로 훼손하는 위헌적 폭거였다.

 

1주일 후 검찰의 소환장이 날아들었다. 그분은 그 소환에 불응하기로 결심했다. 김영삼 정권의 작태는 '역사바로세우기'가 아니라 역사를 파괴하고 말살하려는 폭거라고 판단했다. 역사와 국민을 볼모로 하는 그런 위험한 발상에 대해서는 한때 국정을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면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분은 김영삼 대통령의 이 무모한 행위에 맞서 대국민성명을 준비했다. 그리고 성명발표 전날 밤 내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당신도 이미 감지하고 있겠지만 일이 돌아가는 것이 심상치 않소. 내일 내가 집을 떠나게 되면 당분간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오. 큰아이와 동행할 테니 당신은 따라오지 말고 남아 집안단속을 잘 해주시오.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마음 단단히 먹고, 눈물 흘리는 약한 모습 보이지 말고, 당신답게 잘 처신해주리라 믿소. 고생도 이젠 어지간히 끝난 것 같아 좀 마음 편하게 살아보려고 했더니만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구려. 당신과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하오."

 

미안하다는 그분 목소리엔 비장함이 배어 있었다. 이번 광풍은 그 이전 것들보다 더할 것만 같다는 두려움과 예감으로 나는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이튿날인 1995 12 2일 오전 9.

그분은 연희동 집 앞에서 훗날 '골목성명'이라고 불린 '대국민성명'을 낭독했다. 그분 음성은 비장하고 결연했다.

 

“저는 오늘 이 나라가 과연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또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채 심히 비통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난 11 24, 김 대통령은 이 땅에 정의와 법이 살아 있는 것을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해 5.18특별법을 만들어 나를 포함한 관계자들을 내란 주모자로 의법 처리하겠다고 합니다. 국민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13대 국회 청문회와 장기간의 수사과정을 통해 12.12, 5,17, 5.18사건과 관련하여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답변을 한 바 있고, 검찰도 이에 의거해 적법절차에 따라 수사를 종결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검찰은 대통령의 지시 한 마디로 이미 종결된 사안에 대한 수사를 재개하려 하고 있습니다. 현 정부는 과거 청산을 무리하게 앞세워 이승만 정권을 친일정부로, 3공화국, 5공화국, 6공화국을 내란에 의한 범죄 집단으로 규정하여 과거 모든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현 정부의 이념적 투명성을 걱정하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김 대통령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역사관을 분명히 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전임 대통령 자격으로 김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었고, 김 대통령이 저를 방문했을 때에는 조언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취임 후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 김 대통령은 갑자기 저를 내란의 수괴라 지목하며 과거 역사를 전면부정하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국가의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이러한 내란 세력과 야합해 온 김대통령 자신도 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닙니까?"

 

성명문 낭독은 8분 만에 끝났다. 김 대통령에 대한 그분의 당당한 공개질문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관을 따져 묻고 '군사반란세력'과 야합한 김 대통령의 행적을 추궁하는 내용의 성명은 당시의 상황에서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대국민성명을 발표한 그분은 현충원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그리고는 곧장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가 선친의 묘에 절을 올렸다. 중요한 결정이나 신상의 변화가 있을 때면 선친의 묘를 먼저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는 것은 오랜 세월 그분이 지켜온 예식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그분의 대국민성명으로 청와대가 진노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 소문을 뒷받침하듯 그분에 대한 전격적인 체포작전이 자행되었다. 성명이 있은 바로 다음날인 1995 12 3, 일요일 새벽이었다.

 

만물이 어둠에 쌓여 있던 새벽 6 3분경, 그분은 여장을 풀었던 합천장조카 집에서 급파된 검찰 수사관에 의해 강제 구인되었다. 수백 명의 경찰병력이 장조카 집을 에워싼 가운데 5.18특별수사본부에서 파견된 아홉 명의 수사관이 그분 방으로 들이닥쳤다. 수사관들은 잠옷 바람으로 있던 그분을 깨운 후 서둘러 옷만 걸치게 하고는 곧 수사관 서너 명이 그분의 양팔을 잡아 낀 채 연행차량으로 끌고 갔다. 어느새 집 주위에 모여든 많은 고향 친척들과 주민들이 그처럼 거칠게 끌려가는 그분 모습에 눈물을 흘리며 흥분했다. 그 새벽, 그 어이없는 상황 앞에서 함께 그분 곁을 지켰던 장남도, 또 혈기왕성한 고향 청년들도 안타까운 눈물만 삼킬 뿐 그분을 끌어가는 수사관들에게 순순히 길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분을 태운 호송차량은 4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분은 호송차량 속에서 수사관들 사이에 끼여 앉은 채 그 사나운 압송과정을 견디고 있었다. 4시간 후 호송차량이 도착한 것은 안양교도소였다. 구속 직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11시간에 걸친 신문이 이어졌다.

 

온 국민이 휴식을 취하는 일요일 새벽, 잠자리에 있던 그분을 덥쳐 압송해간 그날은, 김영삼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던 1993 5 13일로부터 꼭 2년 반이 지난 날이었다. 김 대통령은 그 담화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광주문제가 정쟁의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5.18 진상규명은 역사에 맡기도록 하자."

 

백담사에서 연희동 집으로 돌아온 지 겨우 5년 단임 약속을 지키고 스스로 청와대를 걸어 나온 날로부터는 7년여 세월이 흐른 때 벌어진 기습적인 역사의 역류였다.

 

 

단식 소식에 다시 찾아간 백담사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다음날 이양우 변호사가 그분을 면회한 뒤 찾아왔다. 이 변호사는 교도관한테서 들은 그분의 근황을 전해줬다.

간밤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그분이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잠자리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교도관이 다가와 인사를 하자 "나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위로했다.

 

그분은 또 식사에 전혀 손대지 않고 있어 걱정이 된 교도관이 식사할 것을 권하면 웃으면서밥맛이 없어서"라고 가볍게 말했다. 교도관은 '수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식사를 못하는 것 같다고 상부에 보고했고 기자들에게도 그렇게 전했다.

그러나 그분은 단식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12 6일 이양우 변호사가 면회하고 나와 단식 사실을 발표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안양교도소에 구속 수감되신 직후부터 단식 중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제5공화국의 정통성이 전면 부인되는 현재 상황을 결코 승복할 수 없으며 제5공화국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결의이며 그때까지 단식을 계속할 것임을 밝혔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역사정리를 빌미로 한 현 정치보복은 자신에 국한되어야 하며, 역사적 비극인 광주문제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올바른 진상규명이 이루어져 광주 시민의 아픔이 치유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변호사의 발표를 듣는 순간 나는 그분이 또 다시 무엇인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단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자 순간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군 지휘관 시절이나 대통령 재임 중에는 목숨과 맞바꿀만한 위대한 포부와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도소의 감방에 갇혀 있는 무력한 미결수 신분인데 그런 처지에서 또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변해버린 처지의 비참함 속에서도 또 한 번 목숨을 거는 그분의 모습을 생각하자 내 가슴엔 단번에 무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자신이 '반란수괴'로 매도당하는 것이나 제5공화국이 전면 부정당하는 것, 그 모두가 그분으로서는 진실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었다. 게다가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자신의 신뢰가 무너져 내린 것도 그분을 당황하게 했으리라. 김 대통령과는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만한 접촉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 동안 몇 차례의 만남을 통해 김 대통령에게 나름대로 호감을 갖고 있었다. 임기 말 그 분은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 씨를 청와대로 초청해 정국운영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대통령 선거기간 중 연희동을 찾아왔던 김 대통령은 당선 직후에도 연희동 집으로 찾아와 대통령직 수행을 위한 조언도 요청했었다. 또 취임 후 김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국정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사려 깊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5.18 13주년인 1993 5 13, 김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5.18사태는 절대 정쟁의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성명을 발표하자 그분은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었다. 사나운 압송 끝에 내던져진 안양교도소 독방에서도 그분이 김 대통령에 대한 그런 믿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신뢰가 컸던 만큼 상처도 깊었으리라.

 

단식에 임하는 비장한 심정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그것이 병보석과 여론의 동정을 얻기 위한 제스처라며 그분의 의도를 주저 없이 비하했다. "무슨 양심수라도 되는 줄 아는가."

목숨을 건 그분의 비장한 각오를 언론은 '단식 쇼'라는 말로 비웃으며 잠시 떠들썩하다가 곧 슬그머니 중단할 것이라고 냉소를 보냈다. 그러나 난 그분 각오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있었다. 단식이 쉽사리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떨려왔다.

 

수감된 후 사흘이 지나도록 그분으로부터는 단 한 마디의 전갈도 오지 않았다. 신문지상을 통해서만 소식을 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단식을 한다는 소식에 밥은 고사하고 물조차 넘기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내게 큰 아이는 아무래도 단시일 내에 끝날 일이 아닐 것 같으니 백담사를 찾아가 기도를 드리면 심정적 인내심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큰아이의 말이 옳았다. 도저히 그대로는 있을 수 없어 그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둘째 재용 그리고 세 며느리와 함께 집을 나선 것이 그분 단식 시작 나흘째인 12 7일 새벽이었다.

"5공화국이 전면 부정당해 국가를 위해 진력을 다한 우리의 치열했던 진정과 땀이 소멸될 수밖에 없다면 나는 차라리 감옥에서 죽어 나갈 것이다."그분은 큰아이에게 혼신을 바쳐 일했던 5공화국의 7년이 역사 속에서 부정된다면 자신도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단식의 이유를 밝힌 것이다. 그분 단식의 이유는 단순한 정치보복에 대한 배신감이나 분노 따위가 아니었다. 그분은 대한민국 건국 후 현대사 50년이 한꺼번에 위협받고 부정당하는 그 반역사적 정치광풍 앞에 목숨을 걸고 항거하고 있었다. 그분의 단식은 계속됐다. 남자만 면회를 허락하는 교도소의 규칙 때문에 세 아들만이 면회가 가능했다. 그런 이유로 면회 다녀온 아이들이 그분의 뜻과 그분의 상태에 관해 들을 수 있는 나의 유일한 창구였다. 재국, 재용, 재만 세 아들이 전해오는 그분의 용태는 날이 갈수록 안타깝기만 한 것이었다.

 

12 12, 단식 열흘째. 심적으로 괴로운 상태에서 준비도 없이 갑자기 시작한 무모한 단식은 급기야 그분을 무너지게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탈수현상이 닥쳤다. 혈압이 떨어지고 맥박이 빨라지는 이상증상도 나타났다. 단식 열 이틀 째인 12 14, 그분의 안색이 황색을 띠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데도 그분은 면회 온 재용과 재만에게 휴전선의 북한 병력이 이동했다는 보도를 보니 혹 북에서 남침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한 것은 아닌지, 관계기관에서 제대로 대비를 하고 있는지 걱정스럽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답답한 사람. 언제까지 나라 걱정만 하고 있을 참인가.'라는 절규가 내 안에서 솟아올랐다. 그것이 더도 덜도 아닌 그분이었다. 그분 안색이 급하게 황색을 띠기 시작했다는 아이들의 말에 난 그분 몸에 심상치 않은 상황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다. 황급한 심정으로 그날부터 철야기도를 시작했다. 새벽 3시 예불을 시작으로 하루 네 차례 예불에 동참하는 것 외에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6시간 동안 계속되는 철야기도였다. 옥중에서 목숨을 걸고 세상과 싸우고 있는 남편에게 내 마음을 보태기 위한 기도였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에 매달리다보니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젊은 날의 각오가 새삼 떠올랐다. 너무 가난해서 나를 고생시킬 수 없으니 결혼할 수 없다던 그분에게 나는 무엇이라고 다짐했던가 '당신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요' 라고, 얼마나 강하게 다짐하고 맹세했던가. 그 옛날 그분에게 바친 내 사랑의 맹세를 생각하자 가슴속에선 혈관들이 터져 출혈하는 기분이었고, 온 몸은 열에 들떠 기도를 하다 쓰러져 죽어도 좋다는 생각뿐이었다. 철야기도를 시작한 지 사흘째 갑자기 목이 잠겼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기도문을 외웠다. 기도하다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기도에만 매달려있는 동안 많은 기자들이 백담사를 다녀갔다. 그리고 나는 신문기사 속에서 어느새 '7년 만에 또 백담사에 간 가엾은 이순자'가 되어 있었다. 어느 신문에는 이런 기사도 실려 있었다.

 

"그녀의 기도내용은 무엇일까? 정확한 것은 5.18 영령들에 대한 죄의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그 기사를 쓴 기자는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경박한 단언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기자가 쓴 '죄의식'이란 말 속에서 난 또 다시 세상의 악성 유언비어와 왜곡된 보도들이 만들어낸 무서운 오해와 편견을 보았다. 검찰이 5.18사건을 불기소처분하고 수사를 종결하는 발표문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그분은 5.18 당시 현지 작전지휘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분이 국회 청문회 등에서 5.18과 관련해 사과한 것은 5.18 당시의 정보책임자로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통감한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발포명령에 그분은 관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검찰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던 것은 오직 언젠가는 반드시 진실이 밝혀지게 되리라는 실낱 같은 믿음을 안고 기도에 정진하는 일 뿐이었다. 주위에서 아무리 만류해도 그분의 단식 의지를 막을 수 없자 가슴을 끓이던 가족들은 맏손녀 수현이를 할아버지께 데려가 그분을 설득하도록 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손자손녀들에 대한 사랑이 끔찍하던 그분은 특히 맏손녀 수현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다.

 

만약 수현이가 할아버지에게 단식을 중단할 것을 간곡하게 청한다면 혹시 수락할런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그 계획마저도 열두 살 이하 어린이의 면회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교도소의 규칙에 따라 무산되고 말았다.

그분이 설사 수현을 만났다 해도 성공하지 않았을 확률이 더 높다. 그분에게 손주들은 진실로 소중한 존재이긴 했다. 그러나 그런 소중한 후손들에게 오해와 모욕으로 얼룩진 불명예, 잘못된 역사관을 물려줄 수 없다는 결심에서 결행하던 비장한 단식이 아니던가.

 

얼마 후 수감 전 74kg이던 그분의 체중이 64kg까지 내려갔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체중이 64kg이하로 내려가면 심각한 후유증이 우려된다는 의료진의 진단도 있었다. 아이들도 주변 사람들도 단식을 중단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었지만, 그분은 여전히 제5공화국의 정통성이 부인된다면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결연한 태도였다. 사람들이 단식 중단을 간청해오면 그분은 허허롭게 말했다.

 

“나는 아웅산 묘소 폭발사고 때 이미 죽은 목숨이었소. 덤으로 사는 인생, 죽고 사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하겠소?"

 

그런 그분에게 우리가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12 17, 단식 보름째. 그분 몸무게가 12kg이나 줄어들었고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오한에 탈진증세가 몰아쳤다. 돌연 시력이 약해져 유일한 일과인 독서도 중단했다. 목소리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미약해졌다는 소식도 들었다. 더 급한 소식은 그 후에 왔다. 급기야 근육손상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성탄절 경찰병원에서의 첫 면회

 

그분의 구속 사실을 보도하면서 어느 기자는 이렇게 썼다.

“전 전 대통령은 한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욕은 다 먹었으니 이젠 더 당할 것이 없는 밑바닥 삶으로 떨어졌다."

 

더 떨어질 곳이 없는 곳이라고 표현된 그 밑바닥 삶으로까지 추락하고서도 그분은 한 가지 양보할 수 없는 소신만은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의 시련과 혼란까지도 모두가 그분의 정치적 이상이었고 우리의 역사적 과제였던 '평화적 정부이야'의 완전한 성취를 위한 마지막 과정이라는 굳은 믿음이었다.

 

심각한 탈진상태에서 몸무게가 하루에 1kg씩 줄어들자 교도소 측에서도 긴장했다. 12 20, 단식을 중단시키기 위한 법무부의 정식 요청이 있었다. 법무부 요청으로 백담사 도후 스님께서 면회해 단식 중지를 간청한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의지는 변함없었다. 하루 3컵의 물만 마시는 단식은 계속되었다.

 

20일 오전, 교도소로 면회 갔던 아이들은 그분의 상태가 아주 심각해 보였다고 전해왔다. '앉아 있기가 힘드니 그만 가보라'며 다른 날과 달리 일찍 면회를 마쳤다는 것이다. 결국 오후가 되자 혈압이 급격히 떨어지고 시각장애, 청각장애, 심한 탈진현상이 다시 겹쳤다. 의료진은 단식으로 인해 그분의 체내 지방분이 모두 소모되었고 다음 단계인 단백질 소모현상이 오고 있다고 했다. 근육손상의 진행이 빨라지기 시작했다는 심각한 진단을 내린 것이다. 의료진이 긴장하고 있는 혼수상태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혼수상태에 빠지기 직전에도 그분은 손녀 수현에게 생일축하 편지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루 전날인 19일은 수현의 생일이었다.

 

"수현아 몹시 보고 싶구나.

이 할아버지는 수현이가 태어나기 전 용감하고 정의로운 일을 했단다. 그런데 16년이 지난 지금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수현이의 생일도 축하해줄 수 없는 곳에 와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이 할아버지는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명예스럽게 살아왔다. 그리고 또한 할아버지는 수현이와 우석이 정말로 사랑한다. 잘 모르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놀리면 화내거나 싸우지 말고 우리 할아버지는 나라가 어려울 때 최선을 다해 일한 훌륭한 대통령이었고, 어린이를 몹시 사랑한 대통령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해다오."

편지 겉봉엔 '안양교도소에서 할아버지가'라고 씌어 있었다.

 

단식 19일째로 접어들던 21 0 10분경.

그분을 실은 구급차가 안양교도소를 떠나 국립경찰병원에 도착했다. 보도진이 진을 치고 있는 정문을 피해 병원 후문으로 들어가 7102호 입원실로 옮겨졌다. 교도소 측의 공식발표가 있었다.

“현재 전 씨의 건강은 혼수상태 직전으로 보면 된다."

 

그 시간에도 난 여전히 백담사에서 철야기도를 하고 있었다.

21일 새벽 예불을 마치고 법당을 나서는데 서울에서 둘째 재용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있었다. 병원으로 이송될 것이라는 뉴스를 듣고 경찰병원으로 달려가 지키고 있었지만 뵙지는 못했다면서 둘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그 전화통화를 끝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이러다 정말 그분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황감이 닥쳤다. 난 가져온 짐을 백담사에 남겨둔 채 승복 차림으로 정신 없이 서울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 10분경이었다. 그분을 만날 수 없던 나는 또 다시 석간신문을 통해 병원으로 이송된 그분의 상태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석간신문들은 이렇게 적고 있었다.

- 전씨, 영양제 주사도 거부..- 병원에서 단식 계속.

 

다음날인 12 22일은 그분이 단식을 시작한 지 20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이미 체중이 61.5kg까지 줄어든 그분을 병원에서 면회하고 돌아온 재국은 그분이 심한 탈수증세와 현기증으로 입에다 귀를 갖다 대야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며 침통해했다. 그런데도 그분은 여전히 구속집행정지 신청을 절대 하지 말라는 단호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단식 21일째인 12 23일 면회 간 둘째와 셋째는 의료진으로부터 이미17%를 넘어선 체중감소가 더 진행되어 20%를 넘긴다면 정말 극히 심각한 후유증이 우려된다는 소견과 염려를 전해 듣고 돌아와 말을 잇지 못했다. 하루하루 자신을 죽여가는 그분. 하늘은 정말 그분을 이런 식으로 내게서 앗아가시려는 것일까. 피를 말리는 하루하루가 느릿느릿 흘러갔다.

 

“할아버지, 저도 단식할 거예요.”

단식이 23일째 계속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분 상태는 이미 한계체중에 도달해 체내 단백질이 급속히 분해되어 절박하고 위급한 상태로 접어들었다는 의사의 공식 경고가 있었다. 가족들이 애타게 걱정해도 그분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알았다, 내가 알아서 하겠으니 걱정 말라."

그 비장한 대답이 그분 반응의 전부였다. 정말로 자신을 죽여가고 있는 그분을 보며 더 아득했던 것은 나도 자식들도 그런 그분의 완강한 의지를 결코 만류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주는 절대절망이었다.

 

그 동안 난 그분의 면회를 망설여왔었다. 재국이 맨 처음 교도소를 찾았을 때 나는 그분이 아들을 외면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장으로서, 또 무엇보다 한 시대 나라 운명을 책임졌던 전임 대통령으로서의 위상을 박탈당해 버린 채, 미결수로서 수의 차림으로 옥중에 수감되어 있는 자신의 치욕적인 모습을 자식에게마저도 보이고 싶지 않아 했던 것이다. 마지못해 아들을 만난 그분의 첫 마디는 "손자 놈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였다. 아버지의 그런 착잡한 모습을 보면서 재국은 굳게 결심했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에게 어떤 불행이 닥치더라도 결코 이 땅을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이 땅이 아무리 자신을 외면한다 해도 아버지, 자식들과 함께 끝까지 남아 "너희 할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훌륭한 분이다.”라고 가르치겠다고 했다.

 

이미 그 사이 손녀 수현이 일주일 동안 등교하지 못하는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다. 수현은 할아버지를 욕하는 몇몇 학교 친구들에게우리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야."라고 설득하느라 애를 태웠지만 그런 충격을 이기기엔 너무 어린 초등학교 4년생이었다. 평소에도 늘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명예를 중시하는 그분이 자식과 손자손녀들은 물론 아내인 내게조차 수의 차림을 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록 그분이 원치 않는다 해도 난 그분을 만나야만 했다. 더구나 면회가 금지된 교도소가 아니라 병원 아닌가 더 이상 시각을 다투며 그분 목숨을 위협하는 단식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구속 후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그 해 성탄절이었다. 세 아들과 함께 경찰병원에 도착하면서 나는 이 악몽 같은 일들이 악몽이 아닌 엄연한 현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지독히도 나쁜 꿈의 일부이며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라며 난 최악의 현실에 저항했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입원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 마음은 이미 무중력상태가 되어 휘청거렸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 덜컹 소리와 함께 멈춰서자 문이 열렸다. 그러자 두려움과 가슴 떨림으로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만 같았고 귓속마저 윙윙거렸다. 백담사에서 철야기도 때 쏟았던 희망의 담력은 다 어디로 갔는지 난 휘청거렸다. 두려움과 불안한 예감들로 내 심장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서쪽 창가 침상에 환자복을 입은 한 창백하고 쇠약한 얼굴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환자가 바로 그분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분은 나를 향해 아주 잠깐 간신히 오른손을 들어 인사해주었다. 그분은 그렇게 단식 23일째의 미결수로서 압송 이후 처음 아내인 나를 맞고 있었다. 그분의 지독하게 창백한 얼굴을 두 눈으로 보고서야 난 의료인들이 말하는 그 '한계체중'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현기증 때문에 안경도 벗은 채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지내야 하는 그분으로서는 내가 온다고 탈진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워 날 맞아주는 것마저도 힘겨운 듯했다. 14kg이나 빠져나간 야윈 얼굴 위로 두 눈동자만이 촛불처럼 꼿꼿이 타고 있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나는 얼른 달려가 그분의 두 손을 감싸 안았다. 그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평소에도 추위를 잘 타는 그분이 불면증에 갑상선기능저하증세까지 겹쳐 심한 오한에 시달리고 있다던 의사의 설명이 생각났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그분이 먼저 친정아버님의 안부부터 물어왔다. 음력으로 지내는 친정아버님의 생신이 공교롭게도 그 해에는 성탄절이기도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분이 구속되고 얼마 후 그 충격으로 친정아버님께서 쓰러지셨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자신으로 인해 장인과 장모가 모두 쓰러지신 일을 무엇보다 가슴 아파했다. 우리가 백담사에서 나온 후 닥친 어머님의 죽음도 따지고 보면 사위사랑이 끔찍했던 어머님께서 그분 고초에 충격을 받으신 여파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님까지 그분의 구속 충격으로 쓰러지셨던 것이다. 압송 후 마주 바라보는 기막힌 첫 대면인데도 우리 내외는 그저 아버님의 안부를 나누고 있었다. 병실 바닥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그분과 내가 아직도 지진 중인 대지 위에 서 있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캄캄한 심정이 되었다.

 

사흘 후인 28, 단식 26일째에는 결국 그분 신장에 통증이 닥쳤다. 심한 현기증으로 일어나 앉을 수도 없었다. 그분은 누운 채로 아이들을 만났다. 혈액이 크게 줄고 혈당과 심장박동이 현저하게 저하되고 있었다. 체내 저항력은 위험수위에 달했는데도 전날 계속된 검찰의 조사로 혈압까지 올라 화장실도 부축을 받은 채 가야만 했다. 오전에 그분을 면회한 이양우 변호사는 그분의 건강상태가 여간 심각하지 않음을 솔직히 알렸다. 고통이 심해 거의 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미 호흡 곤란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담당의사였던 경찰병원 진료 1부장인 이권전 박사는 기자들에게 그분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전 씨는 아직도 단식중단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는 스스로 발생할지도 모를 신체적 극한상황을 이미 각오하고 있는 것 같다.”

 

다음날인 단식 27일째인 12 29일 오전.

그분은 결국 경찰병원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아슬아슬하게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그 치명적인 순간, 탈진한 그분이 육체적 한계상황을 이기지 못한 채 결국 화장실에서 쓰러져버렸던 것이다.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충격적인 혼절은 그분의 무서운 정신력에도 불구하고 생리학적으로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혼절해버린 그분에게 당장 산소호흡기가 씌워졌고 정맥주사가 처치되었다는 소식이 내게 날아들었다.

 

내 첫 반응은 '하늘도 무심치 않으셨다'는 것이었다. 소식을 듣는 순간 난 그분이 혼절한 것을 하늘의 도움이라고 감사해하고 있었다. 남편이 혼절한 것을 감사해하는 역설, 그것을 하늘의 도움이라고 기뻐해야 하는 그 역설적 상황이 그때 내 처지의 절박함을 설명해주고 있다.

 

경찰병원 측에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산소호흡기와 정맥주사를 준비해둔 상태라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난 또 단식투쟁에 담긴 그분의 결연하고 단호한 결심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만류하거나 중단시킬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분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죽음이 찾아들 때까지 그분 특유의의지력으로 버텨낼 것을 너무도 우려하고 있었다.

 

주위로부터 단식 중에도 검찰의 집요한 수사가 무리하게 강행되어 그분의 탈진을 더욱 재촉한 것 같다는 말을 듣자, 난 원망스럽던 수사관들의 가혹함조차 오히려 고맙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윗사람들의 추상 같은 지시를 따르자니 검찰로서도 그분의 건강상태와는 상관없이 수사를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 비인도적 강박수사가 그분을 사정없이 혼절상태까지 몰고감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분을 살린 전화위복이 되었던 것이다. 다음날인 12 30, 이양우 변호사는 그분의 단식중단을 발표했다. “전 전 대통령은 28일간 지속된 단식으로 건강이 극한상황에 이르렀으므로 가족과 의료진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단식을 일단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미친 듯 병원으로 달려가 면회자 자격으로 들어선 날 보자 그분은 탄식했다. 자신이 정신을 잃고 혼절한 사이, 병원에서 응급처치로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정맥주사를 놓아버렸으니 주사를 맞으면서 계속하는 단식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탄식이었다. 통탄스러워하는 그분의 손을 잡고 나는 혼절한 그분에게 신속한 응급처치를 함으로써 그분의 단식을 중단시켜준 의료진과 하늘의 도우심에 마음속으로 깊은 감사를 올렸다. 산소마스크가 씌워지고 정맥주사가 처치됨으로써 그분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침내 28일간의 비장하고 질긴 단식은 그렇게 중단된 것이다. 정말 다행이라는 말만을 되풀이하던 내 곁에서 큰아이는 전날 그분이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손녀 수현이 새벽에 일어나 썼다는 편지를 그분의 허약해진 귓가에 읽어드렸다.

 

<이순자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 588-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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