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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유배중 찾아온 사람들

이순자 자서전

by nanum* 2022. 10. 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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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회상

 

주체하기 힘들었던 마음이 고통을 딛고 백일기도를 끝낸 뒤, 회향하던 이듬해 5월도 아름다웠다. 신심도 약한 우리 내외가 고독한 산사에서 난생 처음 생의 빛을 구하고 싶어 겁도 없이 감행했던 백일기도였다. 그 어려운 회향을 축하해주시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오신 고승들의 뜻 깊은 법문들을 들으면서 나는 내 깊은 내면으로부터 새 차원의 세계가 열리는 축복을 경험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백담사에 머물렀던 2년여 동안 참으로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다. 전국에서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와 들려주시던 덕망 높은 스님들의 법문은 값진 것이었다. 수많은 불자들의 성원도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으로 남아 있다. 또 종교가 달라도 멀고 먼 부처님의 집까지 찾아와 함께 기도해주시던 수녀님들도 계셨고, 어렵게 모은 성금과 성원의 카드를 들고 찾아와주신 부산 장로교 신도들의 종교와 종파를 뛰어넘은 뜨거운 격려도 있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마운 순간들이었다.

 

처음 열 명, 스무 명씩 드문드문 찾아오던 방문객들은 백담사에서의 첫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나 연일 백담사 마당을 가득 채웠다. 백일기도의 회향일 후 방문객이 타고 온 관광버스가 열 대, 스무 대로 늘어나고 있었다. 매일같이 절을 찾는 엄청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자 다행히 백담사 살림도 많이 나아졌다.

 

마루에 문도 해 달고 방구들도 고칠 수 있었다. 방충망도 달아 극성스런 모기나 등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 중 가장 반가웠던 것은 전깃불이었다. 가느다란 한 촉 촛불 아래서는 책 한 줄 읽기가 힘들어 식구들이 구해다 준 낚시 등을 놓고 책을 보기도 했고, 경운기 엔진으로 만든 발전기로 불을 밝혀보려 애를 쓰기도 했었다. 호롱불을 켜고 지내다 전기가 들어와 형광등을 달게 되자 그 밝은 세상의 경탄스러움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밤새 아랫목에 놓아둔 대얏 물에 수건을 적셔 몸을 닦던 번거로움이 끝나고 비록 고무양동이 속에서 치르는 목욕이지만 목욕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돌이켜보면 6.25전쟁의 고생은 물론, 식생활도 해결하기 어려운 그분 봉급으로 살던 그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행복해했던 우리에게 그때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백담사의 옹색한 살림이 그토록 견디기 어려웠다는 것이 믿을 수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외진 산사까지 그분을 찾아준 수많은 방문자들과 만나면서 그 동안 시련에 찌들려 사납게 일그러진 내 마음결을 발견하고 놀라던 통절한 반성의 시간도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를 격려해주기 위해 멀고 힘든 길을 찾아온 고마운 분들조차도 골방에서 나가 얼굴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끔찍하게 느껴졌었다. 내 괴로움이 턱까지 차올라 다른 사람들의 위로나 격려도 반갑지가 않았고 어디론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그 못난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도 사실은 백일기도를 시작한 후 조금씩 내 고통의 정체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미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목탁소리의 청아함이 가슴에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함께 기도해주러 오신 분들, 찾아와주시는 분들의 성의와 진심을 감사히 받아 안을 수 있었다.

 

<이순자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 536-5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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