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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봉의 키 작은 나무들. 백담사 유폐 뒤 오른 정상(頂上)에서 깨닫다!

이순자 자서전

by nanum* 2022. 10. 1.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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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봉의 키 작은 나무들

 

대청봉 정상에 올랐던 날, 탁 트인 최상의 고지에서 수 백의 봉우리들을 굽어보며 자리잡고 있을 장엄한 모습의 거대하고 우람한 나무들을 상상했던 내 기대와는 달리 정상의 나무들은 모두 거의 기는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세월의 만고풍상이 느껴지는 깊은 연륜의 그 키 작은 나무들을 보며 난 그때까지도 아직 내 내면에서 정돈되지 못한 채 소용돌이치고 있던 한 가지 물음에 대한 결정적 대답을 얻었다.

 

삶의 정상은 몸을 낮춘 겸손한 자만이 머물 수 있는 곳이고, 그것은 철학 이전에 준엄한 자연의존재법칙이라고 하는 것을. 나무건 사람이건 몸을 낮추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곳이 정상이라는 엄숙한 사실을 말이다!

 

우리 내외를 청와대에서 백담사까지 가게 한 그 모든 곡들이 바로 권력의 정상으로부터 하산하는 한 과정이고, 평화적 정권교체의 남은 전차이며, 권력의 정상에 있었던 사람이 1989년 한국 정치사의 바로 그 지점에서 인내하며 겪어야 할 필연적인 시린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백담사 유폐의 시간도 대통령 퇴임의 분명한 한 과정이라는 각성이 일자 그 동안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방황했던 나의 우매한 생각과 분노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밀의)를 알지 못해 난 얼마나 절망하고 몸부림쳐왔던가.

 

어느새 우리는 백담사 어귀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만치 계곡 사이에 가로놓인 외나무다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문득 백담사를 찾아오던 첫날 일이 생각났다. 나는 그날 내 생애 가장 처절한 절망감에 떨며 저 외나무다리를 건넜었다. 마치 이승과 저승의 접경지대에 놓여 있는 듯 느껴지던 그 애잔한 다리를 건너며 나는 내가 세상과 영원히 격리되는 것 같은 허망함과 절망감에 전율했었다. 그러나 이젠 달랐다. 외나무다리 저편으로 초승달처럼 걸려 있는 백담사를 바라보자 마치 정든 집에 당도한 것 같은 반가움과 안도감을 느꼈다. 그날부터 백담사는 더 이상 우리의 유배지가 아니었다. 백담사는 어느새 우리의 정겨운 안식처로 변해 있었다. 그날 밤 그분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우리가 겪는 이 고통도 모두 평화적 정권교체의 남은 과정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려. 최고의 권력을 내놓고 한 시민으로 돌아가는 일이 어떻게 수월할 수 있겠소? 더구나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우리 정치사에선 아무도 가보지 않은, 처음 가는 길이오. 누군가 올바른 각성을 갖고 반드시 닦아놓아야 하는 새로운 길이오. 괴롭고 벅차더라도 우리 한 번 우리 정치사에서 아무도 가보지 않은 이 미답(未踏)의 길을 완주해봅시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오욕과 절망의 세월로 간주했던 지난 시간들이 이제는 단순한 고통의 세월이 아닌 새로운 의미로 성큼 다가왔다. 우리 정치사에서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길, 그러나 이제는 두려움도 망신임도 없었다. 이것이 그분 앞에 놓인 그분의 몫, 그분의 마지막 과제 마지막 관문이라면 함께 손을 잡고 기필코 통과해내야 하리라.

 

<이순자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 530-5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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