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태민안과 영가천도를 위한 백일기도
그렇게 정해진 기도 제목에 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오지, 백담사까지 쫓겨와서 바치는 백일기도인데 아직도 기도의 제목이 국가와 민족이라니. 죽어도 변치 않는 그분 삶의 테마에 난 질리고 말았다.
내 심정은 솔직히 기왕 힘들게 백일간 공을 들여 기도 드리기로 했으니 아무리 마음을 닦기 위해 결심한 기도지만, 부처님 앞에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불가항력처럼 느껴지는 진실해명이나 명예회복 같은 급박한 개인의 소원을 빌고 싶었다. 그러나 내 불만과 항의는 다시 가슴 속에만 남았다. 군에 있을 때나 군을 떠나 대통령이 된 후에나 그분에게 변함없는 우선순위는 항상 나라에 대한 충성이었다. 늘 목숨을 내놓고 살다시피 해온 그분이 아무리 자신의 처지가 힘들고 억울하다 해도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자신의 명예나 안위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었다. 결국 그분의 뜻에 따라 우리는 그 귀중한 백일간을 '국가에는 번영을, 지도자에게는 능력을, 국민들에게는 평안함을 달라'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국태민안과 영가천도의 기도는 그렇게 시작됐다.
기도가 진행되면서 마음속 깊은 곳의 질긴 울화를 좀처럼 놓지 못하던 내게도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처음엔 도무지 가슴에 절실하게 와 닿지 않던 나라에 대한 기도가 서서히 가슴속을 파고들면서, 애초 그분의 기도 제목에 공감할 수 없었던 내 조급함과 작은 그릇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중심제인 우리나라의 대통령 자리란 강력한 통치의 이 주어진 자리였다. 그러니 재임기간 동안 그분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이 정부의 과오나 실수 때문에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더구나 나라의 기강을 튼튼하게 다져 반드시 선진국을 만들어야 한다며 고집스럽게 인기 없는 정책도 마다 않던 제5공화국이 아니었는가.
해직 공직자들, 해직 언론인들, 정리된 기업인들, 데모하던 학생들, 국정에 대해 알지 못하는 내가 생각해도 7년 넘는 그분 통치기간 동안 크고 작은 불이익을 당한 사람의 수가 적지 않았을 것 같았다. 재 임기간 중 그분은 이따금 자신이 선택하게 되는 정책 중 국민의 70퍼센트에게 유익하고 30퍼센트가 불이익을 당하는 정책이 대부분이라며 정부정책이 갖는 필연적 양면성에 괴로워했었다. 고민 끝에 선택된 정책 이면엔 소중한 것을 잃고 불이익을 당하고 상처받는 소수의 국민들의 슬픔과 진통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감싸안고 다독거릴 여유와 여력을 갖지 못했었다. 그러자 '국태민안'과 '영가천도'를 위한 기도는 바로 지금 우리가 반드시 드려야 할 일이라는 자각이 왔다. 그분 재임기간 동안 본의 아니게 희생되었거나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기도, 그것은 사실상 청와대 퇴임 후 그분이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간절한 심정이 들었다.
재임 중에는 나라의 일을 추진하기 위해 앞으로만 달려 나가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조국발전'이라는 영광의 뒤편에 숨겨져 있던 아픈 이들의 눈물에 대하여 겸허하게 머리 숙여 기도했다.
'국태민안과 영가천도 기도'
기왕에 마음과 정성을 모아 드리는 기도라면 그분 통치기간인 제5공화국 시절 뿐만 아니라 건국 이래 한 많은 우리 현대사 속에서 상처 입은 수많은 영혼들을 위한 영가천도 기도까지도 함께 이루어지면 최선의 기도가 되겠다는 스님들의 제안은 우리에게 새삼스런 감명으로 남았다.
과연 이 기도를 백일까지 채워낼 수 있을 것인가? 일생 학교는 학원이든 결석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백팔 배로 땀에 젖은 몸으로 법당을 나서며 두려움에 차 종종 그렇게 자문하곤 했었다. 온 존재를 다해 뛰어넘어야 할 기도의 벽, 초월의 벽을 온몸으로 느끼던 나날이었다. 그렇다고 어렵게 시작한 기도를 도저히 중단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백일기도를 마쳐야 한다는 생각에 죽을 각오로 계속했었다. 그러나 사실 그때 우리가 그 기도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인생 최고의 좌절 앞에서 시작한 그 기도마저 실패할 수 없다는 궁지에 몰린 심정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절벽 위의 기도'였다.
어느 날 너무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몸과 마음의 괴로움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도저히 이대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느끼던 시점이었다. 기도 시작 후 70일 정도 경과된 때였다. 어느날 돌연 그동안 우리 안에서 그토록 날뛰던 모든 증세가 씻은 듯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변화 역시 그분과 내게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이후 상상도 못할 현상들이 찾아왔다. 그 전과는 정반대로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머리는 맑아졌고 몸은 가뿐해졌으며 마음까지 평온해져 아무리 절을 드려도 피곤하지 않은 믿을 수 없는 시간이 온 것이다. 오히려 기도시간이 돌아오는 것이 기다려졌고 그제서야 소중한 기도 제목에 깊이 집중을 할 수 있었다. 갑자기 몸과 마음을 옭아매고 있던 사슬이 풀린 것만 같았다. 기도시간마다 어김없이 우리를 짓누르던 증오, 배신감, 억울함 같은 절절한 번뇌로부터 문득 자유로워지는 우리가 갈망하던 그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그 격렬한 변화가 나를 찾아오던 날, 나는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 속에서 기도시간 내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날마다 나는 피해자고 타인은 가해자라고 그 억울함을 저울에 달아보며 분노 위에 분노를 쌓던 혼돈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긴 기도의 과정을 통해 이 모든 감정의 격랑을 일으키는 것의 정체는 바로 내 마음 자체였다는 것을 알았다. 멈출 수도 없이 온 얼굴을 적시며 흘러내리는데도 이상하거나 부끄럽지도 않고 도리어 온 가슴 후련해지는 눈물의 폭포였다. 그날 나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으로부터 날 건져주신 부처님의 자비에 감사하며 그저 불전에 수그린 머리를 들 수조차 없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다시 반복해 절망과 원망이 내 안으로 들락거렸다. 그러나 적어도 기도시간 동안만이라도 증오심과 분노의 사슬로부터 풀려나 이 고통 저편에서 우리를 손짓하는 다른 차원의 각성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을 조이고 있던 고통의 족쇄로부터 풀려난 그 감격스런 날로부터 우리는 기도시간마다 목청을 돋우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스님들이 가르쳐주신 단전으로 숨을 쉬는 것도 계속되는 훈련과 함께 점점 익숙해져갔다. 하루를 여는 종소리가 산사에 울려퍼지면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이 평안해지는 해방감과 기쁨의 시간이 왔다. 결국 암흑 같던 좌절의 터널 끝에는 고난의 시간이 주는 선물인 상승의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1989년 5월 16일, 백일기도가 끝나고 마침내 회향의 날이 왔다.
우리 부부의 기도 소식을 소문으로 전해들은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특별히 백담사를 찾아와주었다 무사히 마친 백일기도의 회향을 축하해주기 위해서였다. 백일기도는 내게 오르기 어려운 빼어난 명산(名山)의 산정과 같은 것이었다. 증오와 절망으로 방황하던 나를 1백일 동안 곁에서 붙잡아준 그분에게 난 진심으로 감사했다. 자기 자신조차도 가누기 어려운 거대한 마음의 고통이 그분께 있었으리라. 자신의 전 생애가 삽시간에 파괴되는 듯한 파멸감과 비애가 그분께 있었으리라. 그러나 당장 급한 자신의 명예회복 대신 기도의 제목을 국태민안과 영가천도로 확정한 그분의 모습은 기도의 시작부터 내겐 작은 경이었다. 힘겨웠던 만큼 측량할 수 없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회향의 날, 우리 부부는 서로 은둔지에서 얻은 그 최초의 승리를 축하했다.
<이순자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 521 – 5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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