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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심각한 암살과 테러 위험 가운데서도 결행한 '킬리만자로 플랜'

이순자 자서전

by nanum* 2022. 10. 1.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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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심각한 암살과 테러 위험 가운데서도 결행한 '킬리만자로 플랜' 

 

아프리카 순방 -아프리카대륙 순방계획이 극비리에 세워진 것은 1981년이 저물어가던 12월쯤의 일이다. 그 계획은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성산(聖山)인 케냐의 킬리만자로의 이름을 차용해 '킬리만자로 플랜'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다. 그 계획은 관계관들 사이에 상당한 주저와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바로 얼마 전 아세안 순방 당시 캐나다 교포를 이용해 그분을 위해 하려고 했던 북한의 암살기도 계획이 캐나다 정부에 의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민감한 시기에 북한이 제3세계외교를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여 공략하고 성공을 거둔, 북한 외교의 압도적 우세지역인 아프리카 대륙을 방문한다는 것은 마치 전용기를 몰고 적진 한가운데로 기습해 들어가는 것 같은 위험한 시도라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관계자들의 걱정은 매우 심각했다. 그러나 그 대륙이 북한의 외교 영지이며 동시에 우리의 적지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반드시 방문해야만 한다며 이미 결심을 굳힌 그분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외교의 지평(地平)을 확대 다변화해야 한다는 구상 아래 추진한 아세안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그분은 본격적으로 제3세계에 대한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외교 강화를 추진해나갔다.

 

대통령이 직접 최전선에 서서 치러내는 전투 같았던 킬리만자로 플랜의 목적지는 사하라 사막 이남 국가인 케냐, 나이지리아, 가봉, 세네갈 등 4개국이었다. 스와힐리어로 '번쩍이는 산정'이라는 뜻의 킬리만자로에는 사시사철 녹지 않는 만년설이 쌓여 있다고 했다. 한국과 아프리카 사이에도 당시에는 만년설이 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든 계획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마치 특공작전을 방불케 하는 긴장과 흥분을 동반한 순방계획이었다.

 

51개의 국가로 이루어져 있는 아프리카는 사하라 사막 북쪽의 7개국을제외한 나머지 44개 나라가 블랙 아프리카를 구성하고 있었다. 1950년대후반부터 식민지 종주국들로부터 독립을 시작한 아프리카 신생국들은 당연히 반 서방(反西方), 반식민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런 강력한 정서에 가장 효과적으로 파고들어간 나라가 소련과 중공이었다. 북한이 우리에 비해 외교적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중공측에 기울어져 있던 아프리카 국가들은 주저 없이 미국을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 국가로 간주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을 흐르는 그 반미정서, 그 친 사회주의 정서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북한은 제3세계의 중심세력인 아프리카의 지지를 확보한 후 한국을 국제 사회에서 고립시키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 전략은 이미 결실을 거두어 북한은 그녀 이미 아프리카 대륙의 지지를 바탕으로 유엔에서의 열세를 눈에 띄게 만회해가고 있었다. 그 결과 언제부터인지 한국은 각종 국제사회의 표 대결에서 우리의 우위를 더 이상 장담할 수 없는 쫓기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성과에 자신감을 얻은 북한은 아프리카를 향한 외교 공략에 한층 더 열을 올리고 있었다.

 

북한은 많은 수의 아프리카 국가원수들을 평양으로 초청해 환대를 하고 선물공세를 했다. 그 해 봄 북한은 아예 37개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는 공격적인 아프리카 집중외교에 외교자원과 자금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그 결과는 숫자로도 나타났다. 동시수교국이 29대40, 단독수교국은 4대15로 우리가 북한에 현저하게 뒤지고 있었다. 북한과 아프리카는 그야말로 밀월관계의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아프리카는 우리외교의 취약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순방 일정은 1982년 9월 초,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비동맹정상회의를 겨냥해 결정됐다. 순방 일정은 바로 그 직전인 8월 16일부터 9월 1일까지 16박 17일로 정해졌다. 출발 15일 전 뜻밖의 보고가 도착했다. 케냐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정세가 몹시 불안하니 순방을 보류하는 것이 좋겠다는 외무부와 안기부의 황급한 건의였다. 

 

그이는 급히 외무차관과 안기부 관계관들을 파견해 현지 대사와 협조해 가능한 한 계획대로 순방 일정을 실현시키라고 지시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남북한 외교전쟁의 지도를 바꾸겠다는 야심을 갖고 떠나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압도적 거점인 아프리카 방문 속엔 심각한 암살과 테러 위험이 잠복해 있음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결국 남편은 떠나기 전날 큰아들 재국에게 큰 봉투 한 개를 남겼다.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잘 보관하되 만약 아프리카 순방 중 자신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면 즉시 열어보라는 당부도 남겼다. 순방 전 그분이 큰아들에게 남긴 그 봉투 안에는 두 통의 유서(遺書)가 들어 있었다. 한 통은 가족들 앞으로, 또 한 통은 국가비상시를 대비해 국무총리 앞으로 적은 친필유서였다. 

 

북한 요원들이 온 도시를 자기 집 안방처럼 돌아다닌다는 봉고 대통령의 말은 옳았다. 도착하던 날 레옹 움바 공항에서였다. 공항 환영행사 때 참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그때 난 잠시 생각했다. 

"참 이상한 나라도 있군. 왜 국빈 환영행사에서 자기나라의 국가를 먼저 연주하는 것일까?."

환영행사 중 가봉 국가 군악대가 연주한 것은 우리의 애국가가 아니라 낯선 음악이었다. 북한의 국가를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도 우리 일행 대부분도 그것이 북한의 국가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6.25를 서울에서 직접 겪었던 김병훈 의전수석과 황선필 대변인이 그 심상치 않은 참사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단상에서 뛰어 내려가 군악대 지휘자의 지휘를 중지시킨 일은 참으로 적절한 일이었다.

 

"북한측 공관원이 악보 인쇄소를 여러 번 출입했다는 제보가 있습니다."가봉 국가 군악대는 실수로 애국가 대신 북한의 국가를 연주하고 말았던 것이다. 북한 요원이 악보 인쇄소를 들락거리며 악보를 바꿔치기 하는 그런 시도를 했었는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프리카 대륙을 누비는 한국의 지도자인 그분의 대담한 외교를 바라보는 북한의 뒤틀린 심사를 드러낸 치졸한 사건이었다. 앞으로 또 무슨 짓을 해올지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중략)

 

아프리카 순방을 마치고 청와대에 도착하자마자 그 이는 곧장 서재로 갔다. 그리고 유서를 파쇄기에 넣었다.

 

<이순자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 304-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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