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마지막 작별의 밤
그이는 친구 노태우의 대통령직 수행은 자기와는 달리 편안하고 멋진 일로 채워질 것이라며 그렇게 혼자 덕담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운명이 자신과 노태우 당선자에게 각각 다른 역할을 맡길 것이라는 사실을 자신은 파산에 직면한 나라를 인계 받아 살림을 일으켜 세우느라 국민 앞에 아름답고 품격 있는 자태를 보여줄 수 없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 땀에 젖은 이마, 기름 묻은 손, 상처 난 팔뚝이 겉으로 드러난 그이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험난했던 고비를 다 넘긴 바로 그 시점까지가, 시대가 그이에게 맡긴 역할이었다. 열정을 바친 88올림픽도 그 즈음에서 손을 떼고 미련 없이 떠나야 하는 것이 시대가 허락한 그이 역할의 한계였지만 그 일에 대해서도 그이는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케네디가 죽고도 미국은 변함없이 굴러갔소,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오만이고 독선이오."
진취적 기상으로 달 탐험을 이뤄내고 소련과의 냉전에서도 쿠바사태의 도전을 당당하게 이겨냈던 케네디 대통령의 국정스타일을 평소 좋아했던 그이였다. 정권교체를 준비하면서 주변에서 우려나 아쉬워하는 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이는 늘 스스로를 경계하며 단호한 의지를 가슴에 새기곤 했었다.
그날 밤 기분 좋게 취해 자리에 누운 그이는 마치 오랜 출장을 끝내고 고향집에 돌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절반의 여독과 절반의 안도감이 그분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이 얼굴 속엔 이미 청와대에 들어올 때 그이를 가득 채우고 있던 팽팽함 같은 것은 없었다. 대신 또래보다 십 년은 더 늙어 보이게 만드는 과로의 흔적들과 피로감이 깊게 패인 주름 사이에 증거물이라도 되는 양 고여 있었다. 그 모습 속에서 나는 우리의 시간을 보았다. 이제 귀향의 시간이었다. 그이는 누운 채 어둠 속에서 내게 말했다.
"이 순간 내가 당신에게 꼭 해줘야 할 얘기가 있소. 우리 당에서 후임 대통령이 나오고 그가 아무리 내 친구라 해도 퇴임 후 반드시 안락한 생활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보장은 없소. 권력이란, 개인적 욕심에 물들게 되면 마성이 드러나기도 하는 것인 데다 권력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첫 경험인 만큼 누구도 퇴임 대통령이 임기 후 대체 어떤 대접을 받게 될런지 장담할 수 없는 불확실한 실험적 상황인 거요. 다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주던 권력의 갑옷을 벗어버리고 황야로 나서야 한다는 사실이요. 이제부터 나보다 앞섰던 대통령들에게 권력이양이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이었던가를 우리 스스로 알아내고 치러내야 하는 한 가지 관문이 더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솔직히 말해 그날 그이의 말은 운명적일 만치 깊은 예언의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나는 경고 같던 그이의 충고를 전혀 긴장감 없이 듣고 있었다. 나는 그이 말이 그저 권력을 내어주고 떠나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당연히 느껴지는 감상이나 노파심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제부터는 더욱 겸손하고 검소한 자연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을 왜 저토록 비극적 대사 같은 언어로 표현하는 것일까, 의아했을 뿐이었다.
"여보, 당신이 그토록 믿어온 소영 아빠가 새 대통령이 되실 텐데 무슨 걱정이세요."
선거 전 폭풍 전야와 같던 위기의 숨 막힘을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속에서 나는 그저 청와대를 떠난다는 기쁨에만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장밋빛 기분 속에서도 그날 남편의 말은 웬일인지 내 뇌리에 새겨져 영 잊혀지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그 밤 그이의 그 짧은 충고가 기막힌 예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백담사 단칸방에서였다.
<이순자 자서전_당신은 외롭지 않다> 476-4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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