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의 상징이 된 29만원! 생의 족쇄가 된 추징금
1987년 12월 17일,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 밤의 일이다. 남편인 그분은 기분 좋게 취했다. 그분이 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자리에 누우며 어둠 속에서 그분이 내게 말했다.
“이 순간 내가 당신에게 꼭 해줘야 할 얘기가 있소. 우리 당에서 후임 대통령이 나오고 그가 내 친구라 해도 퇴임 후 반드시 안락한 생활이 기다린다는 보장은 없소. 권력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첫 경험인 만큼 누구도 퇴임 대통령이 어떤 대접을 받게 될런 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오. 다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주던 권력의 갑옷을 벗어버리고 황야로 나서야 한다는 사실이오. 권력이양이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이었던지 우리 스스로 알아내고 겪어내야 하는 관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1988년 2월 25일, 그분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날이다. 퇴임의 날로부터 30년 동안 끊임없이 계속된 온갖 시련을 겪고 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울려오던 그분의 말은 운명적이라고 여겨질 말큼 섬뜩한 예언의 뜻을 담고 있었다.
전직 대통령을 깊은 산사에 유폐시킬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없다고 들었다. 3권분립이 보장되어 있는 나라에서 전직 대통령을 국회청문회에 출석시켜 증언을 시킨 일도 전례가 없다고 들었다. 임기를 마치고 박수를 받으며 퇴임한 전직 대통령을 현직 대통령이 위헌적인 소급입법을 제정해 투옥시킨 경우도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청와대를 떠난 지 8개월 후 깊은 산사에 격리되어 유폐생활을 해야만 했고 국회청문회에 출석해 헌상사상 처음으로 증언을 해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느닷없는 5.18특별법 제정 때문에 투옥된 후2년간의 옥고를 치러낸 것도 그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퇴임 후 10년간 집요하게 그분을 강타한 그런 수난은 1997년 12월, 사면복권됨으로써 막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추징금 환수라는 올가미가 그분에게 씌어져 있었고 정치권력은 대를 이어가며 필요에 따라 그 올가미를 당김으로써 그분의 숨통을 조여왔다.
재앙의 뿌리는 '5.18특별법'에 다른 '비자금'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었다. 대통령 재임 중 거둔 정치자금은 모두 '뇌물'이고 뇌물로 받은 돈은 그것이 이미 정치자금으로 사용된 것인지 여부를 따질 것이 없이, 모두 개인이 물어내야 한다는 것이 그 판결의 내용이었다. 2013년 더 엄청난 일이 닥쳐왔다. 그 해는 그분이 퇴임한지 무려 25년이 지났으며, 정치자금사건에 관한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후 15년이나 지난 때였다. 정치권력은 돌연 '전두환법'이란 특별법을 만든 것이다. 그 낯설고 위헌적인 새 법은 우리 가족은 물론 그분 주변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으로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더구나 검찰은 법이 정한 한계를 훨씬 뛰어넘어 그'임무'를 수행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 중 정치자금법을 만들어 필요한 정치자금을 국고에서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정치자금법이 제정되기 이전 시대의 두 전직 대통령이 사용한 정치자금에 대해서만 뇌물죄를 적용해, 그것을 개인이 물어내도록 만든 일은 납득하기 어렵다. 김 대통령은 또 무고한 광주시민을 학살한 살인마를 단죄한다며 5.18특별법을 만들도록 했다. 그 특별법을 통해 김 대통령은 그분을 감옥까지 보냈지만 그 서슬 푸른 재판을 통해서도 그분이 발포명령을 내렸다는 어떤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5.18 당시 수사책임자인 동시 정보책임자였던 그분은 결코 발포명령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았다. 내릴 권한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분에 대한 어떤 유죄의 증거도 찾아낼 수 없게 되자 다급해진 법정은 그 특별법은 태생적으로 그분을 감옥으로 보내겠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만큼 그분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에만 집착한 채 사형선고라는 종착역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5.18특별법을 만들어 전직 대통령 신분인 그분을 구속시킨 김영삼 대통령은 국내외로부터 정치보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 비판을 희석시키기 위해 뒤늦게 착수한 것이 '정치자금 수사'였다. 1996년 열린 재판에서는 대통령 재임 중 기업으로부터 받은 각종 헌금을 뇌물로 몰았다. 그 분은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것은 그 시절까지 우리나라 정당정치의 관행이었고 특정기업의 이권(利權)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고 밝혔다. 그러자 검찰은 대통령이 지닌 막중한 권한에 비추어볼 때 뇌물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들은 그분에게 정치자금 사용처를 모두 공개함으로써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건의했다. 또한 정치자금을 준 기업인들을 증인으로 요청해 검찰이 주장하는 2205억 원이라는 금액이 먼저 기소한 노태우 전대통령과 형평을 맞추기 위해 턱없이 부풀려진 것이라는 사실도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놀랍게도 그분은 변호인들의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치자금에 대가성이 없었다고 주장하려면 그분 재임기간인 7년 반 동안 그 기업인의 회사 장부를 모두 압수해서 철저한 수사를 벌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분은 결국 그 일을 단념했다. 자신의 정치자금 문제가 재계에 대한 전면적 수사로까지 확대되어 기업인들을 비생산적 사(事)에 휘말리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분에게 있어 그것은 국익과 윤리의 문제였던 것이다. 기업인들을 보호하려는 사려 깊은 신념 앞에서 변호인들은 그분을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변호인들의 다음 걱정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기업인들이 송사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을 법정증인으로 신청하는 일을 포기해버리면, 그리고 이후 재판부조차 2205억 원이 뇌물이라고 하는 검찰의 주장을 인정해버리면, 검찰은 그 금액을 모두 추징하려 할 텐데 대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변호인단의 격정은 현실화됐다. 1995년 재판부는 특별법까지 제정한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는지 재임 중 사용한 정치자금에 대해 판례에도 없는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하여 무기징역이라는 중형과 함께 2205억 원이라는 추징금을 선고한 것이다. 개인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완납할 수 없는 가히 천문학적인 추징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분은 변호인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련 기업인들의 법정진술을 통해 정치자금의 상세한 내역과 현금의 액수를 정확히 따져 금액이라도 줄였어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 남편은 사태를 오판하고 있었다. 그분은 재판부가 정치보복이 목적인 정권과는 그래도 진실을 다루는 방법이 다를 것이라고 법관의 양식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남편은 본인이 평생 모은 재산을 모두 몰수당하고도 추징금을 완납하지 못해 그분이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가족, 친지, 사돈의 팔촌이 가지고 있던 재산까지 남김없이 압류당하는, 이조시대를 다룬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악랄한 수모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던히도 잘 참아내던 나에게서도 비명 같은 독백이 터져 나왔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권력을 내려놓고 청와대를 나온, 빛나는 업적을 이룬 사람을 이렇게까지 막 대해도 되는 것인가' 정치권력이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에서 물러나온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사람을, 그래서 정치권에 보호막이 되어줄 사람을 찾기조차 힘든 사람을, 등 뒤에서 찌르고 있다는 느낌을 난 분명히 가졌다.
퇴임 후 줄곧 온갖 참기 어려운 고통을 소리 없이 감내해온 내가 유독 2013년도 일을 참기 힘들어했던 이유가 있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닥쳐드는 흉보와 불행에 인내심이 동이 나기도 했지만 웬만한 시련 앞에서는 미동도 않던 그분이 그 일로 충격을 받아 단기간 심각한 기억상실을 앓았고 한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추징금 환수에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
추징금 환수와 관련해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대법원에서 2205억 원이나 되는 천문학적인 액수와 돈을 추징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일부 언론들이 그 금액이 그분이 퇴임 때 꾸려갖고 나온 비자금인 양 대법원 판결이 나온 그때까지 그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인 양 보도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비난을 받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추징금을 환수하는 방법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일도 가슴 아프다. 추징금 환수는 법원판결에 의해 추징금액이 확정된 뒤 적법절차에 따라 집행되는 것이 원칙이라 했다.
그러나 검찰은 과거부터의 관행이라는 것은 무시한 채 그분이 구속되자마자 잉여 정치자금(264억1천40만원)과 1983년도 공직자 재산등록 당시 신고했던 서초동 산(41) 115의 8의 땅을 매각해 은행에 예금해놓았던 금융자산(48억4천7백88만4837원) 모두를 추징했다. 그러면서도 어찌된 셈인지 그분의 소유로 되어 있는 승용차와 장남 명의의 콘도는 김대중 대통령 때에 와서 추징했고 집은 노무현 대통령 때에 와서야 추징했다. 관행을 무시한 검찰의 추징금 환수방법 때문에 막상 그분 소유의 집이 경매되어 양도소득세가 부과되었을 때는 이미 그분 소유의 금융자산이 단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여서 체납자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막 당선되고 난 후의 일은 더욱 황당했다. 2003년 검찰은 무슨 생각을 했던지 그분에게 '재산명시명령신청을 법원에 제출한 후 법원에 출두해서 선서하라고 통보해왔다. 그분은 변호인에게 자신에게 남아 있는 재산을 빠짐없이 기록해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했고 변호인들은 그분 명의로 돼 있는 연희동 집은 물론 유체부동산, 서화류, 사용하던 골프까지를 망라한 소유물을 남김없이 '재산명시서'에 기록했다. 그런데 마지막 완성본을 읽어본 그분이 자신이 직접 법원까지 나가 선서해야 하는 일이니만큼 누락된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혹시 통장에 얼마간의 돈이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니 알아보라고 했다. 변호인들이 알아본 결과 검찰이 금융자산을 추징해간 휴면계좌에서 총 29만 원의 이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액이지만 정확을 기하는 의미에서 기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부 언론이 그 사실을 마치 그분이 자신은 29만 원밖에 재산이 없다고 주장한 것처럼 왜곡해서 보도했다. 그 이후 그 29만 원은 그분을 조롱하는 상징이 되었다.
<이순자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 688-6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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