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가 전하는 고난의 신비…”당신의 고통은 하나님에게도 고통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희망이다
"의인의 불행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인간 역사에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감당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무능. 그 무능함은 오히려 이 세상을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요, 기다리심이요, 선하심이 아닐까. 전능하신 분의 무능은 하나님의 수난이다. 고난 받는 하나님은 고난 받는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다."
흔히 기독론을 가지고 속죄에 대해서만 얘기하는데, 기독론의 핵심은 '절대이신 하나님이 사람을 상대해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얼굴을 보이신 하나님, 사람들과 마주하신 하나님, 마주하면서 맞이해 주신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상대'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그 상대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사람을 상대한다는 얘기는 사람을 그만큼 귀한 주체로 대접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이 당시 사람 취급 못 받던 죄인들이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사람을 귀하게 대접해야 한다. 힘써 하나님을 변호하려다가 보면 자칫 사람을 내다 버리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아주 거리가 멀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만큼 인간의 존엄성을 선포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저버리면서 하나님을 위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기로 하신 분인데, 사람을 좌절시키면서 하나님을 위할 수 있단 말인가. (중략) 적어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사람을 좌절시키는 일을 하면 안 된다. 특히 고난 당하는 사람 앞에서 조심해야 한다. 고난 당하는 사람 앞에서는 하나님도 말을 아끼신다."
힘(권력) 중심으로 돌아가는 인간 사회는 항상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희생양 들의 피를 대가로 나머지가 평화를 유지하는 메커니즘이다. 옛날에는 제물을 잡아서 피를 흘렸지만, 지금은 구조적인 억압과 희생을 통해서 희생양을 만든다. 사회적 약자들을 차별하고 무시하고 괴롭히고 이런 게 전부 희생양 구조다.
기독교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하나님이 희생양이 됐다', '하나님이 고통 당하는 이들을 위해서 몸소 수난을 당하고 희생양이 됐으니, 이제 더 이상 희생양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완전한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게 바로 이런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혐오에 빠지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이슬람교와 종교적 논쟁은 있을 수 있어도 무슬림을 혐오하는 태도는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 다른 어떤 개인·집단을 향해서도 마찬가지다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말한, 내 앞에 있는 타자의 얼굴을 향한 주체의 '무한 책임' 개념도 결국 유대-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말이다. 사랑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누군가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의 고통을 나눠 가진 거지, 그 사람 때문이 아닐 수 있다. 평소 그런 책임감을 갖고 있다면 타인의 고통과 마주했을 때 실천이 따르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책임감과 사고방식도 중요하다.
고난이라는 설명할 수 없고 파괴적인 경험을 통해 사람이 깊어지기도 한다.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 대개 흔들리지 않는 무게중심을 갖게 된다. 무너지지 않고 강해질 수만 있다면 타인에게 연민을 품고 용서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을 갖게 되기도 한다. 물론 반드시 그렇게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고난을 어떻게 통과하느냐, 죽겠다고 난리 치면서 주저앉아 버리느냐, 스스로 돌아보고 새로운 시각을 얻고 여러 가지로 성숙해지는 계기로 삼느냐가 중요하다.
이렇게 고난은 사람에게도 큰 불행이고 하나님에게도 뜻밖이지만, 하나님이 그 고난을 당신의 뜻 안에서 선용하시기도 한다는 점에서 "고난은 신비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다윗·솔로몬 시대를 거치면서 하나님 잘 믿으면 복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주변 나라들이 흥하는 걸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도대체 뭔가' 생각하다, '아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는 거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니까 믿는 거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
하나님이 폭풍 속에서 나타나 욥에게 하신 얘기는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에게 "나는 나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아무런 설명도 없잖은가. 오직 하나님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욥이 그걸 받아들인 경지에 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분명한 건 신앙의 진수는 복을 바라고 믿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건 자칫 '거래'가 되고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
욥이 자기 고통에서 출발했는데 하나님의 고통을 본 거다. 이것은 굉장한 신앙의 경지로 간 것이다. 보통 교회는 하나님의 고통에 대해 잘 얘기하지 않는데, 그것이야말로 십자가의 핵심이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수난을 당하는가' 하는 전능과 수난의 변증법적 역설이 바로 삼위일체다. 그것을 신앙으로 인식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 같다. 그러니까 욥이 "이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욥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나님의 불의를 물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고통을 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안고 하나님 나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수고를 본다. 이제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의 책임을 물을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고백할 자리가 되었다. (중략) 욥은 자신의 불행 한가운데서 수난을 겪을 분이 아닌 하나님의 수난을 보면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본다. (중략) 좋은 일 속에서 은총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불행 이후 그 절망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본다. 고난의 신비가 아닌가." (260쪽)
저자는 욥이 하나님 마음을 발결하는 대목을 해설하면서 “위로를 받고자 하는 자여, 하나님을 위로하자”라고 썼다. ‘내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이다’라는 인식에 이른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성만찬에 대해 그런 얘기를 했다. "나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통이고, 그리스도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라고.
그렇게 보면 나도 위로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막을 수는 없지만 슬퍼할 수는 있다.
"이제 욥은 인간 편에 선 인간적인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 편에 서는 법을 배운다. 보라, 이제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게 된다. 그 동안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알아주시기를 바랐다. (중략) 그러나 이제는 거꾸로 욥이 수난 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준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자로서 욥은 하나님을 본다. 위로를 받고자 하는 자여, 하나님을 위로하자." (264~265쪽)
영적 전쟁 : 이방신들의 회귀 ㅣ <The Return of gods> 메시아닉 랍비 Jonathan Cann (0) | 2023.01.17 |
---|---|
Great Reset 2030년에 일어날 일, 로마 카톨릭의 정체 (2) | 2022.11.02 |
성, 결혼, 생명, 가정의 세계관 충돌 / 네오마르크스주의 성혁명 (0) | 2022.10.31 |
감시당하는 사회, 개인의 생각과 사고마저 통제하는 사회 (0) | 2022.10.28 |
한자 漢字는 창세기의 기억으로 만든 셈족의 문자 (1) | 2022.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