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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5공 집권과정에 하자가 있다? <전두환 리더십> 282-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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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um* 2022. 10. 18.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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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5공 집권과정에 하자가 있다? <전두환 리더십> 282-297

 

세간에는 전두환은 정치는 잘 했는데 집권 과정에 하자가 있다는 말이 떠돈다. 그리고 이 말은 거의 국민적 상식처럼 유통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저자는 우리나라 대통령 역사상 그를 둘러싼 주위의 선후배들로부터 전폭적인 추대를 받아 자기 의사와는 관계 없이 대통령 자리로 떠밀려 올라간 대통령은 전두환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10.26 줄거리

1979 10 26, 박정희 대통령이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을 마치고 헬기로 돌아오는 도중이었다. 오후 4,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하던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궁정동 안가에서 각하의 저녁식사를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김재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랫동안 엿보다 놓쳤던 기회를 이번에는 꼭 잡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그가 키워준 육군총장 정승화를 궁정동 안가로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김재규의 덕으로 참모총장이 된 정승화는 김재규의 지시대로 궁정동에 와 대기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각하를 시해할 권총을 준비하고 두 대령(박선호, 박흥주)들을 불러 무서운 얼굴로 지시했다. “오늘 내가 각하와 차지철을 해치운다. 각하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경호원들을 모두 사살하라.” 헬기가 도착하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이 별장 앞마당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형님, 오늘 차지철 해치웁니다”. 평소 차지철로부터 수모를 받아온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차지철을 해치우면 박정희 대통령까지 해치운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었다. 만찬시간 1시간 40분 만이었다. 각하, 김계원, 차지철, 심수봉, 신재순이 앉아 있는 상태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총을 쏘았다. 팔뚝에 총을 맞은 차지철은 화장실로 도망갔다. “뭣들 하는 짓이야?” 꾸짖는 대통령을 향해 김재규의 총탄이 날아갔다.

 

이어서 궁정동에 M16총소리가 요란했다. 중정 요원들이 대통령을 수행하던 경호원들을 쏘아 죽이는 총소리들이었다. 이 소리를 정승화는 바로 40m 거리에서 들었다.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각하의 시신에 대한 보안처리를 해달라 명령조로 말하고 자기는 정승화가 기다리고 있는 이웃 별관으로 뛰어갔다. 맨발에다 와이셔츠는 양복바지에서 튀어나와 있었고,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허리춤에 꽂은 권총에서는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김재규는 정승화를 밖으로 나오라 불러놓고 주전자 꼭지를 입에 대고 한동안 물을 들이켰다.

 

“총장 총장 차 대시오”. 두 사람은 정승화 차를 타고 궁정동을 나갔다. 김재규가 정승화에 손동작을 했다. 엄지를 세웠다가 밑으로 내렸다. 각하가 쓰러졌다는 뜻이다. 총소리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정승화는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외부의 소행인가요 내부의 소행인가요?” 김재규는 이에는 답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총장의 어깨가 무겁소, 계엄을 선포하면 어느 부대들이 동원되오?”

 

정승화의 수상한 행보

육본 벙커에 도착하자마자 정승화는 김재규를 앞방에 모셔놓고, 자기는 상황실에서 국방장관이 옆에 와 있는데도 무시하고, 국방장관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상황 처리를 했다. 1,3군 사령관에 전화를 걸어 진돗개2를 발령하고, 20사단장에 전화해 육사로 출동하라 지시하고, 9공수 여단장에게는 육군본부로 출동하라 명했다. 수경사는 차지철의 명령만을 듣게 돼 있다. 그런데 정승화는 월권하여 수경사령관에게 청와대를 포위하고 청와대 경호실 인력이 궁정동으로 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차지철 바로 밑에 있는 경호실 차장 이재전 장군에 명령을 내려 경호실 병력을 동결하라 지시했다. 차지철이 죽었다고 믿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인 것이다.

 

최규하의 양다리

한편 김계원은 각하의 시신을 국군병원에 옮겨놓고 군의관으로부터 각하가 확실하게 사망했음을 확인하고 청와대로 들어가 비상소집을 했다. 8 40분 최규하 총리는 김계원으로부터 은밀히 김재규가 차지철과 각하를 살해했다는 정보를 듣고도 각료들에게 일체 알리지 않고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비상국무회의를 국방부에 가서 열었다. 11:30분 비상국무회의가 국방부 회의실에서 열렸다.

 

대통령이 왜 살해됐는지 누가 살해했는지 묻지 않았다. 단지 신현확 부총리 및 몇 사람만 시신이라도 확인하자 따졌다. 각하 앞에서는 그토록 충성심을 자랑했던 국무위원들은 각하가 왜 사망했는지에 대해 따지려 하지 않고 권력이 누구에게 가느냐에 대한 계산에 눈들만 반짝이고 있었다. 국가는 무주공산이었다, 국무회의는 익일 새벽 00:25에 끝났다. 회의 결과는 익일 아침 4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할 것이었다. 최규하는 이 회의 결과를 즉시 회의장 밖에 있는 김재규에게 귀띔까지 해주었다. 명색이 국무총리가 이러했으니 다른 국무위원들이야 오죽 눈치를 보았겠는가? 그 많은 국무위원들 가운데 범인이 누구냐를 따지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가 쥐 죽은 듯 눈치들만 보았다. 위기에서 국가를 생각하여 나서는 자가 일체 없었던 것이다.

 

김계원의 극적인 배신

26일 밤 11:40분은 역사적인 시각이다. 벙커에 온 김계원은 김재규에게 동조세력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후 노재현과 정승화가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노재현은 정승화에게 김재규를 체포하라 명했다. 그러나 정승화는 다른 일을 꾸몄다. 헌병감 김진기와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고 했다. 이상한 것을 눈치챈 전두환은 육군본부 부안대장 오일랑 중령에게 전화를 했다. “자네 김재규 얼굴 아나?” “” “김재규는 자네 얼굴 아나?” “모를 겁니다지금 헌병복장으로 갈아입고 애들 데리고 국방부에 와서 김재규 체포해.“ 11 27 00:30, 김재규는 오일랑 중령에 의해 체포됐다. 극적인 체포 과정은 [12.12 5.18 다큐멘터리 압축본] 상권 앞부분에 상세히 묘사돼 있다.

 

전두환이 막은 김재규-정승화 혁명

정승화는 노재현 국방장관으로부터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명을 받고서도 그를 비호했지만, 김재규는 전두환의 순발력에 의해 드디어 서빙고 분실로 연행됐다. 거기에서 김재규는 자기가 범인이고 정승화와 함께 행동했다는 것을 털어놨다. 이에 이학봉 중령은 정승화를 즉시 체포하자 했지만 불과 두 시간 정도의 시차로 정승화는 이미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돼 있었다.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는 김재규를 비호하고 자신의 개입 사실을 부인하려 갖가지 시도를 했다. 이학봉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정승화의 구속을 건의했지만 전두환은 12 6일에야 구속을 결심했고 디데이(D-day) 12.12로 결정했다. 1997년 대법원 판결문에는 전두환이 동해경비사령부로 발령 날 것을 눈치 채고 정승화 체포를 결심했다고 하지만 전두환에 대한 인사이야기는 12 9일 골프장에서 노재현과 정승화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말이다. 체포하라 결재한 날은 12 6, 인사발령 이야기는 12 9일이었다. 황당한 판결이었다.

 

10 27일 새벽 4시가 되어 정승화가 서슬 퍼런 계엄사령관이 된다. 만일 전두환이 그보다 3시간 30분 앞선 시각에 김재규를 서빙고 조사관실로 연행하지 않았고, 김재규의 입으로부터 시해 현장에 정승화가 함께 있었고, 육군본부 B2벙커로 정승화 승용차에 동승해 왔다는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다면, 새벽 4시가 되자마자 정승화는 김재규를 풀어주라 전두환에게 명령했을 것이다. 이런 명령이 일단 내려지면 그것은 즉시 공개되는 것이라 전두환이 거부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를 거부하면 세간에는 정승화와 전두환 사이에 내전이 일고 있다고 소란을 떨 것이다. 그래서 전두환은 센스 있게도 정승화에 미리 접근해 말했다. “김재규가 시해범입니다. 그는 지금 서빙고 조사실에 있습니다. 시해 사실을 인정하고 이후의 상황들을 줄줄 불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정승화는 김재규가 자기와의 관계를 불고 있겠구나 하는 짐작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정승화는 새벽 4시에 계엄사령관이 되어 놓고서도 김재규에 대해 손을 쓰지 못했다. 그 대신 도둑이 제발 저리듯 정승화는 허세와 위엄을 연출하면서 전두환의 수사를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자기의 정치적 위상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해 나가다 12.12를 맞게 되었다.

 

 

10.26 12.12는 합쳐서 김재규-정승화의 내란사건

 

10.26사건과 12.12사건은 두 개의 별도 사건이 아니라, 10 26일부터 12 12일까지 46일 동안에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다. 46일 동안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고, 정승화와 함께 혁명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정확히 내란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김재규는내가 각하를 시해하면 국민들이 자기를 추앙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3단계 혁명 계획'도 실토했다. 김재규가 평소에 자주 만났던 정승화에게 이 내란 계획을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알려주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김재규가 구속돼 있는 동안 정승화가 취한 행동을 보면 정승화는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정국 장악을 향한 행진에는 전두환이라는 장애물이 있었다. 전두환이 가지고 있을 정보가 그의 아킬레스건이었던 것이다. 정승화는 분명 김재규를 석방시켜 정국을 장악하려는 행보를 보였다. 정승화의 행보를 철저하게 내사했던 전두환은 그에게 시간을 더 주면 곤란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12 6, 결심을 했다. 그리고 6일 후인 12 12일에 정승화를내란방조혐의로 구속했다.

자신을 동경사로 발령낸다는 정보를 득한 전두환이 미리 선수를 쳐서 정승화를 체포했다는 세간의 소문은 헛소문이다. 전두환이 정승화를 12 12일에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린 날은 12 6일이고, 정승화와 노재현이 글프를 치면서 전두환의 전근에 대해 말을 나누었다는 날은 12 9일이었다.

5.17 5.18은 합쳐서 김대중의 내란사건

10.26 이후의 권력공백기를 맞이하여 국민은 북한의 남침을 가장 걱정했다. 실제로 김일성은 11, 3호 청사에서 남한에 전민 봉기를 유도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고, 이어서 12 20일에는 남조선에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인민무력부는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가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존재하지도 않던신군부라는 말은 이때 김일성이 최초로 사용한 단어였다.

 

4 21, 사북탄광 노동폭력사태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노동자를 포함한 전 계급이 들고 일어나 전민봉기를 일으키라고 간첩들에 지시했다. 1980 3월부터 5.18직전까지 색출한 간첩사건만 7, 남침징후 첩보 5건에 이어 5 10일에는 일본내각으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정보까지 입수되어 정부와 군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반면 안보에는 관심조차 없는 3김 시대의 정치권과 재야세력으로 불리는 불순세력들은 때가 왔다며 최규하 주도의 과도정부를 유신잔당이라 몰아치면서 즉시 퇴진하라며 압박을 가했고, 이에 최규하 정부는 연내에 헌법개정을 마치는 대로 정권을 이양할 것을 수차 약속하면서 재야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학원자유화를 허락했고, 2 29일에는 윤보선, 김대중, 지학순 등 긴급조치 위반자 687명에 대해 사면-복권을 단행하는 등 유화조치들을 취했다.

 

재야세력이 말하는 이른바서울의 봄’, 신나는 계절이었던 것이다. 김종필은 공화당, 김영삼은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민당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뛰쳐나와 학생 세력과 노동자 세력을 이끌어온 재야세력을 결집시켜국민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부대를 결성하고 학생과 노동자들을 선동하면서 폭력시위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4월 하순부터 시작된 대학생 시위는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 규모로 확산됐고 이에 고무된 김대중은 5 7, 1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하여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 전국내각구성, 모든 구속자 석방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며 정부를 압박했고, 학생들을 향해서는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김재규도 김주열이나 김상진 못지않은 애국 충신이라며 과격시위를 선동했다.

 

김대중은 4 10, 5 1, 5 10 3회에 걸쳐 북악파크에서 문익환, 예춘호, 장기표, 심재권 등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 집단을 이끌고 전국 폭력시위에 의한 국가전복 계획을 수립하고 24명으로 구성된 김대중의 혁명내각을 작성했다. 5 15일은 서울역에 10만 시위대가 모여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정도에 이르렀고, 당시 내무장관은 소요진압이 경찰의 범위를 넘는다며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역 시위에 극도로 고무된 김대중은 5 16, 2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했다. 5 22일을 기하여 군인, 경찰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국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정부를 전복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었던 것이다. 정부가 전복되고, 국가가 혼란에 빠져 남침조건을 마련하도록 해줄 것인가, 아니면 김대중이 이끄는 재야세력과 이들의 조종을 받는 복학생 조직을 분쇄할 것인가! 최규하 정부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맞이한 정부의 선택이 바로 5.17 조치였다. 5 17,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긴급히 소집하고, 10.26 이후 선포됐던지역비상계엄’(제주도 제외)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5.18일 새벽 2시를 기해 전국 136개 국가시설을 보호하고 31개 주요 대학을 점령하기 위해 25,000명의 계엄군을 배치하는 한편, 5.17 자정을 기해 이른바 김대중 내각을 구상했던 김대중, 김상현 등 24명의 내란음모자들을 체포하고 학생 주동자들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최규하 정부와 계엄당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전국은 무법천지가 됐을 것이고, 북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북한군은 제2 6.25남침을 감행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소용돌이 정국에서 흔들리지 않고 국가를 지켜낸 사람들의 중심에 전두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관들은 당시 북한의 위협은 별로 없었으며,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국민에 겁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폭동이고, 신군부의 마음속에 내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5.17은 내란을 위한 폭동이라는 우격다짐의 판결문을 썼다.

 

 

12.12는 호국사건

많은 사람들이 12.12를 쿠테타라고 믿고 있다. 12.12가 쿠테타라는 말은 진실이 아니라 모략이다.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이 진실이 아니듯, 12.12가 쿠테타라 하는 것도 진실이 아니다. 1979년 당시 정승화는 4성 장군으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었고, 전두환은 2성 장군으로 계엄사 합수부(합동수사본부) 부장이자 보안사령관이었다. 1979 12 12일은 박 대통령이 시해당한 10 26일로부터 46 일째 되는 날이다. 46일이 정승화가 릴레이 범행을 이어가는 직권남용 기간이었던 것이다.

 

1979 12 12, 전두환이 직위와 계급상 자기보다 훨씬 상위에 있는 정승화를 체포한 것은 하극상도 아니었고, 쿠데타도 아니었다. 정승화가 46일 동안 저지른 범죄혐의가 엄청나서 체포한 것이다.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말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하늘의 명령으로 알고 산다. 4성 장군에 범죄혐의가 있으면 수사당국은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수사를 해야 한다. 전두환이 바로 수사당국의 최고책임자였다. 법을 수호하고 있던 최후의 보루였던 그가 무너지면 법도 무너지는 것이었다.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오른 날짜는 1980 8 27일이었다. 1979 12 12일에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그 즉시 대통령이 되어야지, 어떻게 9개월 넘게 최규하 대통령을 극진히 모신 후에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는가. 이런 코미디 같은 쿠데타는 이 나라 말고는 다시 없을 것이다.

 

12 12, 오후 6 30, 전두환은 수사국장 이학봉을 대동하고 국무총리 공관에서 집무하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 가서 정승화 연행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다. 당시는 정승화에 대한 의혹이 사회적으로 확산돼 있었고, 이러한 것은 극비사항이기 때문에 보안상 중간단계를 거칠 수 없었다. 10.26이후 대통령 최규하에게 시국수습에 대한 중요한 보고를 해온 사람은 오로지 전두환 뿐이었고, 최규하는 전두환을 신뢰하고 의지했다. 매우 중요한 정보이고 중대한 사안이기에 전두환은 재가가 쉽게 나리라 생각하고 보안사 수사팀에게 무조건 오후 7시에 정승화를 체포하라는 사전 각본을 짰다.

 

그런데 의외에도 최규하는 국방장관을 앉힌 자리에서 재가할 것을 고집했다. 정승화를 체포하는 일은 원체 큰일이라 전두환은 평소 군에서 여론을 이끌 수 있는 9명의 장군을 보안사 정문 맞은편에 있는 수경사 30단으로 초청하여 재가가 끝나는 대로 체포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려 했다.

 

한편 명령을 받은 허삼수와 우경윤 등은 4명의 보안사 서빙고 수사관들을 태우고 7 05분에 정승화 총장 공관으로 갔다. 서빙고로 가자는 대령들의 권고를 받은 정승화는 순순히 응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고, 이로 인해 그의 부하들과 수사관들 사이에 총격전이 유발되어 그의 부하들과 범죄수사대 우경윤 대령이 평생 불구로 지내야만 했던 중상을 입었다. 정승화는 한 때 보안부대장을 지냈다. 그래서 그는 저항해봐야 피해만 발생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불필요한 호기를 부리다가 여러 부하들에게 평생 회복할 수 없는 중상들을 입히고 말았다. 박 수사관은, 그의 직속상관인 우경윤 대령이 정승화 아들이 2층 계단에서 내려다보고 쏜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 큰대자로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악에 비쳤다. 그는 곧장 응접실 대형 유리창을 M16 개머리판으로 깨고 들어가이 새끼하면서 정승화의 가슴에 총구를 댔다. 얼굴이 사색이 된 정승화는 그제야 풀이 죽어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한편 국방장관 노재현은 대통령이 빨리 와서 결재하라는 호출 명령을 받고도 이리저리 피해 다녔고, 피해 다니는 동안 군에는 지휘공백이 발생하여 정승화 군벌과 30단에 모인 장군들 사이에 불필요한 긴장이 유발됐다. 긴장이 일자 불길한 생각이 든 9명의 장군들 중 5명이 밤 9 30분에 대통령에 가서 정중히 인사를 하고, 정승화 군벌의 군사적 난동으로 인해 군과 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질 찰나에 있으니, 서둘러 재가를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대통령은 "장관 오면 해줄게" 하고 여유를 부렸다. 평생 외교관으로만 지내온 최규하는 그 만큼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것이다.

 

3군사령관 이건영,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참모총장 권한 대행인 윤성민 참모차장 등 수도권 실세들이 나서서 30단에 모인 장군들을 무조건 반란군이라 규정하면서 병력을 동원했다. 그리고 30단과 청와대 지역을 전차포와 야포로 융단공격하려고 전차와 포와 병력을 남산 밑 아스토리아호텔 앞으로 집결하고, 30단과 보안사를 향해 포병 사격명령을 내리고, 자기 예하부대 대령들이 전두환에 충성하니 그들을 보는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을 납치하여 정승화를 구하고, 무장헬기로 정승화를 구출하려는 막다른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전두환은 점 조직으로 병력을 동원해 이들 모두를 체포했다. 이로써 군과 군 사이에 충돌하는 일촉즉발의 내전이 극적으로 정지됐다.

 

담을 타넘어 다니기도 하고, 부하 집에 숨으려 하기도 하고, 8군으로 도망하기도 하면서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서 대통령 호출에 불응한 국방장관 노재현은 새벽 1, 1공수여단과 국방부 옥상에 배치됐던 수경사 병력 사이에 발생한 총소리에 겁을 먹고 또다시 숨었다. 국방부 건물 지하 1층 어두운 계단에 전속부관과 함께 숨은 것이다. 노재현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대통령과 함께 하룻밤을 지새운 신현확 총리는 참다못해 자기가 나서서 노재현을 찾아오겠다며 국방부로 향했다. 이에 공수대원들이 국방부 건물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새벽 350! 드디어 국방부 건물 1층 계단 밑에 숨은 장관과 그 전속부관을 발견했다.

 

노재현과 그 부관에 총구를 겨눴던 병사들은나 장관이다하는 말에 경례를 한 후 그를 장관실로 모셔왔다. 신현확 총리는 노재현 장관, 이희성 중정부장, 국방차관 김용휴를 태우고 총리공관에 있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달려갔다. 가는 도중 노재현은 보안사에 들려 대통령 재가문서에 결재를 한 후 대통령에 가서 꾸중을 듣고 재가를 얻었다. 4 30분에서 05 10분 사이였다. 최규하는 서명란에 05:10분이라 쓰고 서명을 했다. 최규하, 실로 답답한 꽁생원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형편없는 노재현은 누구인가? 1926년 생으로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방장관 모두를 거친 당대의 인물이었다.

 

12.12의 밤, 장태완은 국방부 옥상에 배치된 수경사 발칸 포에게 사격명령을 내렸다. “국방부에 제1공수여단이 올 것이니 주저 말고 발사하라.” 박희도 장군이 이끄는 공수1여단이 국방부에 진입하자 옥상에서 장태완의 명령을 받은 발칸포가 불을 뿜었다. 여기에서 교전이 발생했다. 이 교전 소리를 듣고 국방장관 노재현이 차마 가서는 안 될 계단 및 먼지 쌓인 공간에 몸을 숨긴 것이다.

 

노재현이 장관실을 팽개치고 도주 행각을 벌이고 있던 시간, 국방부라는 지휘부를 지키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김용휴 차관이었다. 공수부대와 수경사 장태완이 지휘하는 국방부 옥상에 배치된 벌칸포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는 순간, 국방장관 노재현은 국방부 건물 1층 계단 밑에 숨었지만, 국방차관 김용휴는 차관실에서 의연히 자리를 지켰다. 그에겐들 왜 총소리에 의한 공포감이 없었겠는가. 장관이 계단 밑에 숨어 있는 동안 그는 1공수 병사들의 공격을 받았다. 1공수 장병들이 국방차관실 문을 발로 박차고 문을 열어 제치며 M16소총 총구를 겨눴을 때, 김용휴는 그야말로 장군 출신답게 태연했다.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다 들어주겠다. 어서 말해라장병들은 그에게 정중히 거수경례를 하고 나갔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1996-97년에 진행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전두환이 죄 없는 정승화를 체포하고, 정식 지휘계통에 있던 윤성민-장태완이 정승화를 풀어주라는 명령에 전두환이 불복하면서 5명의 장군을 보내 대통령을 협박하고, 공관 주변을 경계하는 집총 병사들로 하여금 대통령에 겁을 주게 하여 대통령 재가를 강요했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1996.7.1. 18회 재판정에 나온 신현확 전 총리는 장군들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고 정중하게 건의를 한 후 돌아갔으며, 대통령과 하룻밤을 새우는 동안 공관 경비병을 의식한 적은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12.12. 이후 전두환에는 대통령 말고도 두 사람의 직속상관이 더 탄생했다. 꼬장꼬장의 상징 이희성 계엄사령관, 그리고 노재현의 뒤를 이은 손금 없다는 공군 출신 주영복 국방장관이었다.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했던 주영복은 손을 잘 비벼서 손금이 없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널리 돌았다.    

 

전두환은 이런 층층시하에서 9개월 이상 복무하다가 대통령 최규하를 포함한 수많은 선배장군들의 추대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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