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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서울의 봄

역사

by nanum* 2023. 12. 1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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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정치 문화 역사는 북의 대남공작 역사
 
2023년 9월 27일 5.18 조사위원회 제3과장 이하 3명이 서울구치소에 두 번째 조사차 방문했다. 북한에서는 매년 5월이면 28개 도시 전역에서 5.18을 성대하게 기념한다는 사실이 42개의 결정적 증거 중 하나로 꼽혀 있는 것을 탄핵하기 위해 “북에서는 5.18뿐만 아니라 4.19도 기념한다고 하는데 그럼 4.19도 북한이 개입했다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필자는 “4.19도 북괴 간첩이 배후 조종한 사건이다.” 이렇게 대답했다. 눈들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근거가 있습니까?” “핸드폰 가지고 있으니 이석, 이명영 교수를 검색해봐라.” “성균관대 이명영 교수는 유명한 대북 전문가다. 그는 책 [통일의 조건]에 ‘보안사 조사관에게 이석이 털어놓은 이야기’를 실었다. 이석은 4.19는 물론 1946년 9월 폭동과 10월 1일부터 3남 지방을 피바다로 만든 대구폭동도 배후 지휘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조사3과 요원들은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암기하고 있느냐”라며 더 이상의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거물간첩 김용규가 저작한 [소리 없는 전쟁]을 읽어봤느냐? 1999년 원민 출판이 내놓은 책이다. 그 책에서 김용규는 남한에서의 크고 작은 모든 시위는 100% 북한의 소행이다. 북의 배후 조종이 없는 학생시위, 노동자, 농민 시위는 없다. 김대중을 목포에서 당선시키기 위해 피 터지게 선거운동을 해준 존재는 통혁당이었다.”
 
목포 역전에서 한 김대중 연설에는 이 말이 키워드다. “여러분 내 눈을 똑똑히 보십시오. 저는 포부가 큰 사람입니다. 시시하게 돈 같은 거는 밝히지 않습니다.” 1967년 목포 역전의 유세였다.
 


김일성과 김대중이 기획한 전국 폭동과 남침의 배합전
 
1980년 봄을 ‘서울의 봄’으로 인식하는 국민은 많아도 ‘서울의 봄’에 남침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필자 말고는 없을 것이다. ‘서울의 봄’이라는 것은 최규하가 모든 시국 사범들을 묻지마 식으로 감옥에서 꺼내주고 복권 시켜 준 사실을 표현한 말이다. ‘시국 사범’이라는 말은 적화통일을 지향하는 빨갱이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김대중은 1980년 4월 초부터 노골적으로 학생들을 선동했다. 민주화를 위해 피를 바치라는 연설을 매일같이 하고 다녔다. 1980년 4월 3일 서울대를 시작으로 학생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졌다. 하루가 멀다 할 만큼 시위의 규모와 양상이 험악해졌다. 4월 10일 김대중을 북악 파크 호텔에 추종자들과 복학생들을 모았다. 이 자리에서 장기표는 학생시위를 격화시켜 4.19와 같은 무정부 상태를 만들 테니 선생님은 집권의 기회로 삼으시라는 말까지 했다. 5월 1일, 김대중과 그 추종자들이 다시 북악 파크 호텔에 모여 전국 시위로 정권을 뒤엎은 뒤, 새로 출범할 [김대중 혁명정부의 내각]을 구성했다. 24명이 각 부 장관에 선정됐다. 5월 15일 서울역에는 10만 대학생 시위가 열렸다. 버스로 경찰관들을 깔아뭉개고, 청와대로 진입할 기세를 보이다 어쩐 일인지 거기에서 멈추고 해산했다.
 
어쩐 일일까? 지금도 많은 운동권들은 그날 청와대로 몰려가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워하면서 당시의 시위 주도자 심재철을 원망한다. 심재철의 독자적인 결단이었을까? 여기에 상상력이 동원된다. 바로 다음 날인 5월 16일, 김대중의 선전포고문을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난다.

 

김대중의 전국 폭동명령
 
5월16일, 김대중은 이른바 제2차 ‘민주화촉진선언’을 한다. 이는 1석2조의 효과를 냈다. 전국의 추종자들은 모두 5월22일 정오를 기해 들고일어나라는 명령으로 들었을 것이고, 정부는 국가에 대한 선전포고로 인식했다.
“정부는 계엄령을 즉각 철회하고 내각을 총해산할 것 등을 김대중에게 5월19일까지 통보하라. 이에 불응하면 5월22일 정오를 기해 장충단을 중심 거점으로 하여 전국시위를 단행할 것이다. 학생, 노동자, 농민은 모두 일어나 민주화시대를 열 것이며, 군인과 경찰은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성스러운 시위에 동참하라.”
 
최규하는 헌법 초안만 마련되면 즉시 과도정부를 해산하고 선거를 치르겠다고 수십 번 약속을 공표했지만 마치 민노총의 원조인 위장취업자들이 기업을 도산시키기 위해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내걸고 폭력을 행사하듯이 김대중 역시 똑같은 공산당 수법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상상해보자. 감히 계엄정국 하에서 국가를 뒤엎어버리겠다고 공공연히 나대는 이 뒷배는 무엇이었겠나? 이때는 5월 중순, 5.18이 임박해있던 시기였다. 김대중이 5월22일을 ‘전국폭동의 날’로 정해놓은 상태에서 심재철이 5월15일 청와대로 밀고 들어가면 5월22일의 거사가 커다란 방해를 받는다. 따라서 서울역에서는 심재철이 10만 시위의 위력만 보여주는 선에서 곧바로 해산해버린 것이다. 서울역 시위가 간첩의 기획물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김일성의 남침준비
 
10.26이 발생해 남한이 무주공산, 주인없는 세상이 되었는데 이를 김일성이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적보다 더 기적일 것이다. 김일성은 5월22일 김대중이 주도할 전국폭동을 드라마틱하게 성공시키기 위해 10월 말부터 살인기계로 훈련시킨 맥가이버 특수원들을 10~30명 단위로 잠수함과 태백산을 통해 광주 근방으로 침투시켜 5월18일 이전에 600명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광주에서 호응할 김대중 프락치들을 조직케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광주에 상륙시킬 10만대군을 해주에 대기시켜놓았다. 전국 폭동이 성공하면 김대중은 의로운 전쟁을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북에 공식 발표하고, 김일성은 이를 명분으로 휴전선을 통해 남침을 하면서 인천상륙작전처럼 해주에 대기하던 10만대군을 광주로 상륙시켜 전쟁을 3일 이내에 종결하려했다. 당시 ‘3일전쟁’은 군 내에서 유행어처럼 번졌다. 이 3일전쟁의 성패 여부는 김대중의 전민봉기의 성패여부에 달려있었다. ‘전민봉기’는 ‘전국봉기’의 김일성 표현이었다.
 
전민봉기 전격차단한 전두환의 신의한수
 
당시의 국민정서하에서 김대중을 단지 전국규모의 시위를 선포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에 대한 계엄사령관의 조치는 단지 계엄을 보다 강화한다는 것에 불과했다. 이것이 5월17일, 국방장관이 소집한 전군지휘관회의의 회의결과였다. 5월17일, 밤12시에 계엄령을 확대강화하는 포고령을 내렸는데도 5월18일 광주에서 계엄군을 비웃고 폭동을 일으켰듯이 김대중이 건재했다면 5월22일에도 김대중이 포고한 폭동이 전국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전국폭동을 좌절시킨 신의 한수가 바로 김대중 체포였던 것이다. 

 

김대중을 체포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명분이 있어야만했다. 그것이 북악파크호텔에서의 ‘내란모의’와 ‘혁명내각’명부였다. 이 정보를 추적했기에 김대중을 아슬아슬하게 체포할 수 있었다. 김대중을 체포했기에 5.18을 진압할 수 있었고, 5.18을 진압했기에 김일성의 남침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적화통일 일보직전에서 전두환이 김일성-김대중의 콜라보 야욕을 무산시킨 것이다. 국민은 미국 상원의원 매카시가 대한민국을 살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낸다. 매카시가 없었다면 6.25가 발생했을 때 트루먼이 즉시 파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민은 1980년 5월의 남침계획을 김대중을 전격 체포함으로써 좌절시켰다는 사실을 모른다. 

 

북악파크호텔을 추적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을 5월17일에 체포할 수 없었다. 김대중 체포의 명분이 ‘내란모의 혐의’였다. 김대중과 김대중 추종자 24명을 체포하자 주동자 잃은 김대중 졸개들이 5월22일의 전국시위를 포기했듯이, 주동자 없는 폭동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광주의 폭동은 동서고금을 통해 유례가 없는 무서운 폭동이었는데도 주동자가 없다. 주동자가 바로 김일성이었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이다. 주동자는 광주에 직접 내려온 김중린과 리을설이었다.

 

[지만원메시지(200)] 전두환 VS 5.18, 어느 쪽이 민주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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