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은 누구인가?
6.25 전투가 한창 진행되고, 젊은이들이 많이 필요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밴 플리트 UN군 사령관에게 각별한 부탁을 했다. “대한민국에 미국 육군사관학교 West Point의 복사판을 설치해주시오.” 이렇게 해서 진해에 육군사관학교가 설립되었다. 1951년 전두환 동기들은 정규 육사 4학년 과정으로 선발되어 미 육사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독서광
전두환은 독서광이었다. 내무반 생활상 밤 10시에 불을 끄고 아침 6시에 기상해야 했다. 하루에 허용된 자습 시간은 2시간, 2시간을 가지고는 학업 내용에 대한 복습과 예습을 하기에도 부족했다. 일제히 소등이 되면 전두환은 신문지, 판초 우의, 책, 전등을 가지고 화장실로 갔다. 당시 화장실은 재래식이어서 1분만 앉아있어도 눈이 시큼시큼해질 만큼 악취가 진동했다. 전두환은 화장실 구멍을 신문지로 두껍게 덮고 그 위에 판초 우의를 깔아놓고 때로는 새벽 시간까지 독서를 했다. 독서는 그가 공수부대 여단장을 할 때도 많이 했다. 그 여단에서 인사 참모를 했던 육사 19기는 전두환이 원하는 책들을 사 나르느라 바쁘다고 필자에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토의가 생리화
그는 동기생들보다 연장자이기도 했지만, 의사가 통하는 5~6명의 동기생들과 주말에 외출해 밤늦도록 장차의 군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느냐의 주제를 가지고 토의를 했다고 한다. 이런 토의 습관은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에도 계속됐다. 그는 모든 정책을 토의를 통해 수립했다. 미국 유학을 두 차례 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식 지휘요령을 터득했고,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관찰을 유심히 하였다.
국가경영에 깊은 관심
중령 때에는 청와대를 경비하는 대대장을 했다. 이때 전두환은 청와대 각 부서에 다니면서 각 부서는 어떤 일을 수행하는가에 대해 유심히 묻고 다녔다 한다. 1968년 1월, 김신조 침투조 30여 명이 청와대 지근 거리까지 침투했다. 전두환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청와대가 뚫렸을 것이다.
김신조 일당 일망타진한 영웅
그때 전두환은 어떻게 했는가? 여러 달 전에 상상을 했다. ‘밤중에 적 특공대가 들어오면 적군 아군이 뒤섞일 텐데 캄캄한 밤에 어디를 향해 총을 쏜 것인가?’ ‘그는 청와대 경비대가 보유한 박격포를 평시에 포탄만 위에서 통속으로 넣으면 자동적으로 발사될 수 있도록 포구를 청와대 양쪽 상공을 지향하도록 방열해 놓고, 바로 옆에는 조명탄만 많이 적재시켜 놓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침투조가 검문하는 경찰 간부를 총으로 쏘면서 비상이 발령됐다. 전두환은 즉시 조명탄 발사를 명했다. 청와대 주위는 단숨에 밝은 대낮이 되었다. 하늘에는 조명탄을 서서히 낙하시키기 위해 펼쳐진 낙하산들이 곡선들을 그렸다. 31명이 암살조로 침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33명이 진실이다. 김신조 소위가 잡혔고, 대위를 포함한 반탐조 3명이 생포됐다.
작두 작전
보안사는 3명을 보안사 서빙고로 데려가 회유를 했다. “충성맹세서를 써라. 그리고 북에 가서 대한민국에 충성하라.” 세 명은 호기를 부리며 저항했다. 작두를 가져왔다. 호기를 부리던 대위가 목을 넣었다. 배짱이 있으면 잘라보라는 식이었다. 신문자가 그대로 작두를 눌렀다. 그러자 방 안에는 피가 낭자했고, 잘려진 얼굴에는 눈이 한동안 살아있었다. 이 모습을 본 2명은 그 자리에서 충성맹세서를 썼다. 우명훈과 림태영이었다. 이 두 사람은 이수근이 판문점을 넘어올 때, 북이 쇼를 부렸던 것처럼, 남한의 쇼에 의해 북으로 넘어갔다. 휴전선을 넘어가는 동안 우리 병사들이 두 사람을 향해 불을 뿜는 쇼를 한 것이다. 두 사람은 북에서 영웅이 되었다. 림태영은 3성 장군, 우명훈은 2성 장군, 이러한 식으로 우리 박정희 대통령이 북에 심어놓은 우리 측 간첩이 250명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1998년 10월에 모두 처형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되면서 국정원 간부 1,000여 명이 일거에 숙청되었고, 국정원에 기록돼 있던 명단이 북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이는 2011년 말 중앙선데이에 연재됐던 내용이다. 황장엽이 광주에 왔고, 혼자만 왔던 것이 아니라, 당시 현역 대남공작 부장 김중린, 인민군 전설인 리을설, 김덕홍이 함께 5.18 광주에 왔다고 진술한 내용도 증거 인멸시킨 것으로 증언돼 있다. 중앙선데이는 이 말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 국가기록원에서 목 없는 시체 사진을 확인했다.
제 1로 땅굴 발견
최전방 전투사단 20여 개 중에서 가장 전투서열이 높은 부대가 서울의 길목을 막고 있는 1사단이다. 전두환은 1사단장 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먼저 땅굴을 발견하였다. 땅굴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고 전 부대원에게 지시돼 있어야 찾을 수 있는 존재다. 전투를 잘하는 지휘관은 늘 “내가 적장이라면 무슨 계책을 꾸밀 수 있을까?” 이것을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더 축적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 되었다.
경제 개인 수업
보안사령관은 당시 모든 정보를 그 누구도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 직보(직접보고)하게 돼 있었다. 모든 정보는 자신있게 보고를 하겠는데 경제 분야가 약했다. 그는 매일 아침 김재익을 위시한 경제 전문과들과 기업인들을 초청해 새벽 특강을 받았다. 이조 때, 왕들이 받는 [경연]수업인 셈이었다. 그는 경제 전문가가 되었다. 업체들이 중공업 투자를 중복해서 과잉 투자하는 풍조가 제어되지 않고 있어서 과도한 외채 문제가 곧 IMF를 불러올 수 있는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였다.
김재규라는 공룡, 즉시 체포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시해했을 때 전두환의 나이는 47세, 신참 2성 장군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갔다가 헬기로 돌아오신 박정희 대통령이 고단했던 하루를 정리하는 조촐한 식사 자리에 앉았다. 김재규는 평소의 앙숙인 차지철을 살해하고 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을 앞에서 쏘고 뒤로 가서 뒤통수까지 쏘았다. 총을 허리춤에 꽂고, 맨발로 40m 떨어진 별채에 대기하고 있던 정승화에 달려갔다. 와이셔츠에는 피가 낭자하게 튀어있었고 앞섶은 허리띠 밖으로 뽑혀져 나와 있었다. 화약 냄새와 피 냄새가 김재규 몸에서 풀풀 솟았다. 별채로 달려간 김재규는 부엌으로 가서 노란 큰 주전자를 입에 대고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정, 정, 정총장 빨리 나오시오” 떨리는 음성을 날렸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무슨 일입니까?”하고 물었다. “빨, 빨.. 빨리 갑시다. 당신 차 오라 하시오” 운전수 옆자리에는 육군 대령(육사 19기) 박흥주가 탔고 뒤에는 김재규와 정승화가 나란히 탔다.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다. 더구나 김재규는 맨발이었다. 부관인 박대령은 자기 신발을 내주고, 평소 준비했던 와이셔츠와 상의를 내주었다.
최규하의 배신과 반역
김재규는 차 안에서 정승화에게 비상계엄을 선포시키라고 주문했고, 벙커에 도착한 정승화는 국방장관 노재현이 옆에 와 있는데도 본체만체하면서 전화기를 들고 김재규가 바라는 대로 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차지철이라는 경호실장만이 지휘할 수 있는 경호대와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까지 지휘했다. 차지철과 대통령이 살해되지 않고서는 감히 꿈조차 꿀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한편 시해 현장에서 김재규를 도와줬던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최규하 국무총리(권한대행)에게 귓속말을 해주었다. “김재규가 차지철과 각하를 시해했습니다.” 8시 40분이었다. 최규하는 이 사실을 알고서도 이후 김재규를 옹호했다. 이 사실은 전두환도 다음날 알게 됐다. 그래도 이런 잡놈을 전두환은 9개월 동안 깍듯하게 모시고 시국을 수습했다.
정승화의 반역
11:40분, 간신배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뒷배경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김재규를 배신했다. 국방장관실은 김재규가 차지하고 있었고, 장관보좌관실에 국방장관 노재현과 정승화와 김계원이 앉아있었다. 이 자리에서 김계원은 대통령 시해범이 김재규라는 사실을 털어놨다. 소스라치게 놀란 노재현은 즉각 정승화에게 “빨리 안에 있는 김재규를 체포하라”하고 장관실에 있는 김재규를 턱으로 가리켰다. 정승화가 장관의 명령을 따를 리 없었다. 정승화는 꾀를 냈다. 헌병감 김진기와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벙커로 불렀다. “헌병감은 장관실에 앉아계시는 김재규 부장님의 신병을 인도해 보안사령관에게 인계하라, 보안사령관은 보안사가 관리하고 있는 정동 안가로 정중히 모셔라.” 안가는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처럼 꾸며진 최상의 호화공간이었다.
전두환과 오일랑
눈치 빠른 전두환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 그리고 국방부 건물 맞은편 (지금의 전쟁기념관 자리)에 사무실이 있는 오일랑 보안사 중령에 전화를 걸었다.
“오중령, 너 김재규 얼굴 알아?”
“네”
“김재규는 네 얼굴 알아?”
“모를 겁니다”
“그러면 됐어. 너 당장 부하랑 헌병 옷으로 갈아입고 장관실에 앉아있는 김재규를 유인해서 서빙고로 데려가”
오일랑은 헌병 행세를 하면서 김재규에게 갔다. “지하 벙커에 있는 정승화 총장님이 부장님을 몰래 모셔 오라.” 했다며 그를 컴컴한 비상계단으로 안내해갔다. 건물 문을 열자마자 갑자기 헌병 옷을 입은 어깨들이 김재규를 차 안으로 밀어 넣고 양쪽에서 감시했다. 후암동 헌병 초소가 나타나자 김재규의 목을 앞으로 밀어 헌병이 김재규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김재규가 말했다. “세상이 바뀌었어” 서빙고에 도착하자마자 김재규는 자기가 새 세상을 열었고 정승화가 시해 현장에서부터 자기를 수행했고, 지금도 자기 명령대로 계엄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불과 몇 분 사이에 최규하는 국무회의를 열어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의결해 내렸다. 사실 최규하는 역적이었다.
정승화 체포
시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과 김재규가 시해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정승화는 그것을 숨기고 비상국무회의에서 계엄사령관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1979년 12.12.사태가 발생할 때까지 47일 동안 김재규를 의인으로 부각시키고, 정치 현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신을 향해 좁혀들어오는 수사를 방해했다. 정승화를 빨리 체포하자는 이학봉의 건의를 여러 번 뒤로 미룬 전두환은 12월 12일을 D-day로 정했다. 자기는 오후 7시에 이학봉 수사단장과 함께 최규하 대통령에 정승화 체포에 대한 결재를 받으러 갈테니 서빙고 수사팀은 19:30분에 무조건 정승화를 연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이전에 정승화는 수사팀을 여러 차례 불러 고압적인 자세로 자기는 시해 사실을 김계원이 실토할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입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꼼수에 불과했다. 청와대 경호실 차장은 이재전 중장이었다. 정승화는 B2 벙커에 도착하자마자 경호실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경호병력을 시해 현장으로 가지 못하게 고압적인 목소리로 지시했다. 수경사령관 역시 차지철의 명령만 받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정승화는 수경사령관 전성각에게 전화를 걸어 청와대 경비병력으로 하여금 청와대를 포위하도록 지휘했다. 차지철과 대통령이 살아있다고 생각했다면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월권행위를 한 것이다. 이 10.26사건을 수사기록으로 분석할 때에 만일, 분석하는 사람이 경호병력과 수경사를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청와대 경호단장 차지철뿐 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정승화의 범죄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을 것이다.
정승화는 계엄사령관이 되자마자 수경사령관을 교체했다. 스스로 촌놈 출신이라고 말하는 장태완이 수경사령관이 됐다. 장태완은 공개적으로 “나 같은 촌놈을 영광스러운 이 자리에 임명해주신 정승화 각하께 건배”라는 건배사를 외치기도 했다.
정승화는 보안사령관을 거친 사람이다. 보안사 수사관들과 계엄사 수사 대령이 공관에 찾아와 정중하게 “녹음장치가 돼 있는 수사실로 가시자”라며 요청할 정도면 사안의 엄중함을 알아차렸을 텐데도 큰 소리를 지르고 경호 헌병과 부관을 부르는 등 소란을 피웠다. 수행 경호 대장과 전속 부관이 총을 빼 들다가 수사관들 총에 여러 차례 사격을 당해 일생 내내 불구가 되게 했고, 정승화 아들이 계단에서 헌병 대령을 쏘아서 평생 하반신 불수가 되게 했다. 이것이 정승화의 품위 없는 추태였다. 결국 수사관이 거실 유리창을 M16 개머리판으로 깨고 들어가 “이 새끼 못 일어나~”하고 망신을 당한 후에야 순순히 차에 올라탔다.
12.12는 추태쇼
한남동 육군 총장 공관에서 벌어진 이 총성 소동은 즉시 정승화 부인에 의해 윤성민 참모차장에게 전달됐다. 윤성민 차장은 정승화의 심복이었다. 윤성민은 즉시 장태완에 “총장님이 체포됐다. 빨리 구해라.” 전화를 걸었고, 당시 술이 잔뜩 취해 있던 장태완의 난동이 시작됐다. 특정 사령관 정병주, 헌병감 김진기 등이 군사를 동원했다. 군은 아군끼리 충돌하는 내전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재가 사항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성격의 사건이었다. 총소리에 놀란 국방장관 노재현은 단국대 담을 넘어 여의도 부하 집에 가서 숨기도 하고 8군에 가서 숨기도 하다가 끝내는 국방부 1층 계단 밑으로 들어가는 등 새벽 4시까지 숨어다녔다. 이에 최규하는 재가가 늦어지면 아군끼리 내전이 발생한다는 다급한 상황을 여러 차례 보고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국방장관이 먼저 서명해야 재가할 수 있다.”라며 황소 고집으로 버텼다. 애국심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보신주의자였다. 결국 12.12는 4대 추태 사건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정승화 추태, 장태완 추태, 노재현 추태, 그리고 최규하의 보신주의 추태인 것이다.
<지만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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