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사 유배중 찾아온 사람들
백담사 회상
주체하기 힘들었던 마음이 고통을 딛고 백일기도를 끝낸 뒤, 회향하던 이듬해 5월도 아름다웠다. 신심도 약한 우리 내외가 고독한 산사에서 난생 처음 생의 빛을 구하고 싶어 겁도 없이 감행했던 백일기도였다. 그 어려운 회향을 축하해주시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오신 고승들의 뜻 깊은 법문들을 들으면서 나는 내 깊은 내면으로부터 새 차원의 세계가 열리는 축복을 경험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백담사에 머물렀던 2년여 동안 참으로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다. 전국에서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와 들려주시던 덕망 높은 스님들의 법문은 값진 것이었다. 수많은 불자들의 성원도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으로 남아 있다. 또 종교가 달라도 멀고 먼 부처님의 집까지 찾아와 함께 기도해주시던 수녀님들도 계셨고, 어렵게 모은 성금과 성원의 카드를 들고 찾아와주신 부산 장로교 신도들의 종교와 종파를 뛰어넘은 뜨거운 격려도 있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마운 순간들이었다.
처음 열 명, 스무 명씩 드문드문 찾아오던 방문객들은 백담사에서의 첫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나 연일 백담사 마당을 가득 채웠다. 백일기도의 회향일 후 방문객이 타고 온 관광버스가 열 대, 스무 대로 늘어나고 있었다. 매일같이 절을 찾는 엄청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자 다행히 백담사 살림도 많이 나아졌다.
마루에 문도 해 달고 방구들도 고칠 수 있었다. 방충망도 달아 극성스런 모기나 등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 중 가장 반가웠던 것은 전깃불이었다. 가느다란 한 촉 촛불 아래서는 책 한 줄 읽기가 힘들어 식구들이 구해다 준 낚시 등을 놓고 책을 보기도 했고, 경운기 엔진으로 만든 발전기로 불을 밝혀보려 애를 쓰기도 했었다. 호롱불을 켜고 지내다 전기가 들어와 형광등을 달게 되자 그 밝은 세상의 경탄스러움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밤새 아랫목에 놓아둔 대얏 물에 수건을 적셔 몸을 닦던 번거로움이 끝나고 비록 고무양동이 속에서 치르는 목욕이지만 목욕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돌이켜보면 6.25전쟁의 고생은 물론, 식생활도 해결하기 어려운 그분 봉급으로 살던 그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행복해했던 우리에게 그때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백담사의 옹색한 살림이 그토록 견디기 어려웠다는 것이 믿을 수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외진 산사까지 그분을 찾아준 수많은 방문자들과 만나면서 그 동안 시련에 찌들려 사납게 일그러진 내 마음결을 발견하고 놀라던 통절한 반성의 시간도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를 격려해주기 위해 멀고 힘든 길을 찾아온 고마운 분들조차도 골방에서 나가 얼굴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끔찍하게 느껴졌었다. 내 괴로움이 턱까지 차올라 다른 사람들의 위로나 격려도 반갑지가 않았고 어디론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그 못난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도 사실은 백일기도를 시작한 후 조금씩 내 고통의 정체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미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목탁소리의 청아함이 가슴에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함께 기도해주러 오신 분들, 찾아와주시는 분들의 성의와 진심을 감사히 받아 안을 수 있었다.
<이순자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 536-538쪽